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축복이 내렸다. 얼마 전 함박눈이 온통 세상사 아픔들을 감싸 안고 내렸다. 바람도 멈춘 고요 속에 냉기마저 훈기로 점령되고 순간 아늑한 낙원이 펼쳐졌다. 몸과 마음이 다 꿈결 속에 떴다. 함박눈은 세모의 축복 전령이다.

먹장구름 아래 어둑어둑하던 저녁 나절부터 시나브로 내리던 눈발은 밤이 되도록 그치기를 반복했다. 가로등 불빛에 비끼면서 하염없이 흩뿌려지는 눈꽃송이들은 녹청색 개똥쑥 이파리며 자잘한 씨알들 위로 켜켜이 쌓였다. 

낭만이었다. 둘은 위아래에서 서로 미세한 떨림으로 교감했다. 자연물 사이의 순정한 앙상블 키스였다.

지난 봄·여름·갈 내내 쟁여 왔던 개똥쑥의 오묘한 향기에 눈꽃송이들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나 보다. 화장품으로 만들어져 인간을 유혹하는 그 냄새에는 자연 간의 이런 전력(前歷)이 있었음이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버려졌느냐/ 들판의 개똥처럼 살아왔느냐/ 거름 한번 주지 않아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길섶에나 밭두둑에나 튼실하게 내리박고서/ 명아주지팡이처럼 뻗어 올려 우거진 개똥쑥 푸나무/ 잔가지 잎사귀마다 허브 향 쑥내가 은은하다// 늘상 외로우면 외롭지 않다/ 늘상 그리우면 그립지 않다/ 모두의 관심 밖에 살아온 것이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이 됐다/ 들판의 개똥처럼 살아보아라, 버려져 보아라/ 외롭고 그리울 새 어디 있으랴/ 허브 향 쑥내가 절로 날 거다."

내 미발표 시(詩) ‘개똥쑥’이다. 이제 흰 눈은 김광균이 저 일제강점기 때 ‘설야’로 노래했던 그리움이나 서글픔이 아니다. ‘서글픈 옛 자취인 양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의 그 희미한 눈발’이 아니다.

순백이 뽀송뽀송하게 쌓일 때, 누군가 먼저 지나간 발자국에 내 발자국이 덮이고 또 눈 쌓여 지워지고… 한밤 길 소복이 쌓인 눈, 녹고 나면 길바닥은 갖가지 속내를 다 드러낼 거다.

아서라! 함박눈에 덮여 있는 그 한때만이라도 시름은 멀고 열락이 함께 한다. 왜 소인묵객들이 강설이며 만설(滿雪)을 노래하고 그렸을까. 거꾸로 현실이 그만큼 각박했다는 것일 수 있다.

이 함박눈에는 밤길, 눈길이 들어 있다. 둘 다 문학 창작의 제재로서 제격이다.

이태준과 윤정모의 단편소설 「밤길」은 1930년대 막노동 고행살이나 1980년대 슬픈 시대상황이 그려져 있다. 박남수의 자유시 ‘밤길’은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리는 식민지의 암흑상황이 나타나 있다.

한편, 이청준의 단편소설 「눈길」을 보면 1970년대 모자간의 애달픈 봉별상황에 속가슴이 저린다.

이즈막 우리나라 시국상황이 이런 문학 속의 과거 우울한 정경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세계 10대 선진국에 진입했다지만, 물질적 수치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들이 상당하다.

우선 내년 제20대 대통령선거에 대해 벌어지는 정치상황이 덤불밭이다.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자와 관련, 주변인의 자살이니 징역형이니 하는 소식들은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부정적인 요소다. 국민들의 화만 돋운다. 마치 근세 조선시대 수양대군 세조나 강화도령 철종 임금이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게다가 내년 경제는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 상황 도래로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생활 여건이 크게 악화될 전망이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여차하면 온전한 밭농사는 고사하고 나라가 더 심한 덤불밭이 되지 않을지 우려된다.

이 와중에 눈물겹도록 살신성인하는 공직자들이 있다. 보건소 직원들이다. 코로나19 검사, 역학조사, 재택치료 관리 등 격무로 인해 언어장애, 스트레스는 물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장갑을 벗고 곪은 손을 닦는다고 한다. 이들도 생업에 종사하는 우리 국민들이다. 고마움과 함께 위로의 댓글이라도 보내야 한다. 

점점 대선일이 다가온다. 정녕 이 난국을 바로 세울 최선의 인물을 택해야 한다. 흔히 차악이라도 선택한다지만 이는 기득권층의 현학적 언변일 수 있다. 주요 언론 보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국민 개개인이 냉정한 판단을 해야 나라가 일어설 수 있다.

함박눈에 개똥쑥 같은 인물이 있을 것이다. 동지를 기점으로 길어지는 해에 목련꽃봉오리가 맺혔다. 모두 세모를 잘 여의고 내년 새 아침을 맞이하길 염원하며 송구영신 시조 띄운다.

- 길다운 길 -

 지나온 길 꿈같은데 
 또 한해가 저무누나

 

 애환 서린 오만 사연 
 찰나 속에 묻어두고

 

 길다운 
 그 길이 어딘지 
 새삼 내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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