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초반의 일화 한 토막으로 먼저 시작하고자 한다. 대학교수들의 학생 평가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모아 선풍기를 틀어 놓거나 창문을 열어 바람이 부는 쪽에서 높이 날려 자기 앞쪽에 떨어지는 순서대로 학점을 줬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학생들이 많이 써 제출한 리포트는 무거워서 바로 떨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리포트는 가벼워서 멀리까지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보고서의 양을 성실과 노력의 관점에서 중시해 이를 질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개그 수준의 웃기는 이야기지만 당시는 꽤 진지하게 생각해 열심히 공을 들여 리포트를 작성하던 대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또 있다. 어느 도예 선생님이 수업 첫날, 반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A그룹은 많은 항아리를 만들어 오는 학생에게 A학점을, B그룹은 가장 완성도 높은 항아리를 만든 학생에게 A학점을 주겠다고 말했다. 평가 방법은 간단했다. A그룹의 양(量) 평가 방법은 항아리의 전체 무게가 20㎏이 넘으면 A학점을, 15㎏이 넘으면 B학점을 주는 식이었다. 반대로 B그룹의 질(質) 평가 방법은 완벽한 작품 하나만 제출해서 A학점을 받는 방식이었다. 과연 어느 그룹에서 훌륭한 항아리가 나왔을까? 뛰어난 작품이 나온 곳은 양(量)으로 학점을 주는 A그룹이었다. 

 이 원리는 피카소의 작품 활동과도 연계된다. 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남긴 다작(多作)의 화가였다. 그 결과 미술사의 흐름을 전환한 것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는 걸작품이 많이 나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원리는 스포츠에도 적용된다. 안타를 많이 치다 보면 그 중에 홈런도 많이 포함된다는 야구의 이야기도 맥락을 같이 한다. 

 세상이 변하는 원리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법칙이 있다. 바로 ‘양질 전환의 법칙’이다. 이는 ‘양적 변화가 축적되면 질적으로 변화한다’는 개념이다. 즉, ‘양(量)이 넘치면 질(質)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법칙 중 하나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쉬운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물은 99℃에서 끓지 않는다. 100℃가 되는 순간 끓기 시작한다. 수증기가 돼 기체로 바뀐다. 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100℃가 될 때까지 열을 계속 가해 물이 펄펄 끓도록 한다는 점이다. 만약 중간에 가열을 중단하면 물은 뜨거울 뿐 끓지 않는다. 수증기가 생기지 않는다. 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주역」에 나오는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궁(窮)하면 변(變)하고, 변하면 통(窮)하며, 통하면 오래간다(久)’는 뜻이다. 결국 사물이 극에 도달하면 변화가 생기고, 변화가 발생하면 막힘 없이 통하고, 통하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천지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서 궁(窮)은 더는 나아갈 수가 없을 만큼 극도의 상황으로 양적 변화가 극에 달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교육에 적용해 보자. 학생들은 교사의 끊임없는 관찰과 대화, 그리고 격려와 응원이라는 양적 관리가 필요하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원격수업이 병행되는 오늘의 학교교육은 교사의 관심과 사랑, 대화와 격려가 결여돼 학력 저하 및 학습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 결과 예년에 없던 자퇴 학생이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양질 전환의 법칙과 궁즉통(窮則通)은 바로 지금,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지금은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이 요구된다. 여기엔 어느 분야든 충분한 연습과 훈련이 뒷받침돼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을 잊지 말자. 더불어 우리 속담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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