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

새해 아침 샘물 맛은 싱싱했다. 영하 10℃를 오르내리는 혹한에도 하얀 김이 피어났다. 땅속 수맥의 순정한 온기가 내 입속으로 퍼져들었다. 수정 고드름이 달린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맛은 차가운 듯 다사한 듯, 혀끝이 열락으로 가늘게 요동쳤다. 마치 세태에 찌든 몸매에 청정수로 세례 받는 느낌이었다.

근처 울창한 숲속, 낙엽을 밟으면서 체조와 심호흡을 마칠 때는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샘물이 주는 금상첨화의 축복이다. 또 한 해를 맞으면서 인근 산자락에 있는 샘터를 찾았을 때다.

집안의 식수로 오래전부터 길어 먹던 생수다. 말이 생수지 내게는 약수나 다름없다. 여태까지 이 물을 먹고 큰 탈 없이 지내왔으니 과언이 아니다. 약식동원이다.

요즘이야 지자체에서 관할 샘터 조성으로 정기적 수질검사까지 해 주지만, 그 전에는 예부터 전해오거나 개인들이 발굴한 곳들이었다. 새 도로 개설로 즐겨 이용하던 생수터(약수터)가 사라질 때면 마치 피붙이를 여의는 느낌도 겪었다.

이제 반세기 전쯤 내 어릴 적 고향 우물로 돌아가본다.

‘우물’은 ‘샘물’의 확정 개념이겠다. 샘물보다 훨씬 더 크고 깊으며 역사성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공동 우물터가 있었고, 우리집에는 전용 우물터가 있었다. 수도가 없던 당시 우물은 시골마을의 신성한 필수 시설이었다. 매년 음력 정월에 수신(水神)에게 우물고사를 올릴 정도였다.

그 당시 동네 아낙들이 머리에 똬리를 얹고 가득 담은 물독을 이고 오거나 남정네들이 양쪽에 2통이 걸린 물지게를 지고 가던 모습들이 선연하다.

여성들이 우물가에서 주고받는 세상 이야기를 ‘우물가 공론’이라 부르기도 했다. 본채와 아래채 사이, 마당 한편에 있던 우리집 우물은 사시사철 마른 날이 없었다.

우물틀 안으로 속을 내려다보면 켜켜이 쌓아올린 돌 틈으로 물이끼가 더러 끼인 듯 파르스름한 빛깔에 맑은 물이 넘쳐나던 정경이 그대로 떠오른다.

지금 내 고향 땅은 집터만 남았지만, 우물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다. 매년 선산 벌초 무렵 들를 때면 꼭 그 우물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이처럼 우물은 생명의 본향이며 원초적 본능이 머무는 곳이다.

"…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그리워집니다.∥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자화상’을 줄여 편집했다. 여기 우물은 명경지수 같은 거울을 상정했지만, 동주는 또 ‘참회록’에서 녹이 낀 구리 거울을 꺼냈다. 거기에 비친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발바닥으로 닦으려 했다. 이에 우물은 참회와 반성과 고백을 함유한 자기성찰로도 알맞다.

또한 사찰의 우물(샘물)은 감로각, 용왕각 같은 간판을 붙인 단아한 정각 속에서 떠 마실 때 정죄와 깨달음의 의미로 활용된다.

고도 경주에는 저 신라시대 발굴된 우물터만 해도 21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들 우물의 테두리 틀로 쓴 통돌들을 보면 당시 서라벌 사회상에 비친 우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건국의 시조 박혁거세의 나정(蘿井)과 그의 부인 알영우물에 이르면 개국과 탄생의 의미로까지 쓰였으니 말이다.

고려 시조 왕건이 당시 금성(나주) 지방을 지나면서 목말라 물을 청했을 때, 우물물에 버드나무 잎을 띄운 앳된 아가씨(장화왕후)의 설화도 건국과 관련된다.

올 1월 1일 우리 가족은 해맞이 등산 대신 명동 인근 나들이를 했다. 신세계백화점 전면에 펼쳐지던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 관람 후 서울로를 거쳐 서울스퀘어빌딩 벽면 줄리언 오피의 ‘걸어가는 사람들’ 동영상(미디어아트)을 봤다. 귀가하는 동안 시작도 끝도 없는 그 사람들의 발길이 뇌리에 남았다.

천부경의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이 오버랩됐다. 시방은 초연결 시대, 휴대전화 소통으로 다함께 있으되 혼자인 사회, 나라든 개인이든 모두가 이 외로움을 이겨 낼 때,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포효에 묘서동처는 기죽어 사그라지리.

우물은 늘 긍정적 상징이며 시작을 뜻한다. 발코니 화단 동백 꽃봉이 발그레하다. 

시조로 새 희망의 두레박을 끌어올린다.

-새 동네 꿈 동네 -

 참싸릿대 매 추워도
 꽃눈 잎눈 피어나듯
 
  아무리 가물어도
 우물물이 솟아나듯
 
 구정물
 천지일수록
 청정수를 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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