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연 전 인천시약사회장
김사연 전 인천시약사회장

「개항장 한 세기 건너 지금」을 받아 봤다. 이 책은 미래의 희망 도시문화정책연구소 류인희 대표와 인천시 홍보콘텐츠 팀장으로 ‘굿모닝 인천’ 총괄편집국장을 맡은 김진국 박사의 공동 저서로, 가천문화재단의 지원금을 일부 받아 제작했다. 

창작지원금을 신청하거나 인천문화재단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아트플랫폼을 들를 때가 있다. 이곳은 붉은 벽돌로 건축한 개항기 옛 창고건물들을 용도에 맞게 기술적으로 리모델링한 집합 촌이다. 그 건물 가운데 H동과 A동엔 ‘칠통마당’이란 커다란 이름표가 붙어 있다. 칠통마당? 미술가들이 페인트 통을 늘어놓고 예술활동을 하는 장소인가? 그러나 내부를 둘러보면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인천의 문화와 예술을 관장하는 품격 있는 문화재단이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가꾸겠다는 시설에 웬 어울리지 않는 칠통마당인가 찜찜해 오던 중 궁금증을 풀게 됐다. 이 책을 읽고 나서다. 책장을 덮으며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닌가 흐뭇함에 잠긴다. 

책 중 ‘칠통마당 vs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칠통마당은 2020년 9월 12일 개통한 수인선의 한 역인 ‘신포역’에서 중부경찰서에 이르는 부두 구간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고(故) 신태범 박사의 명저 「인천 한 세기」에는 "경찰국 뒤 해안 일대는 객지에서 실어 오는 볏섬을 받아 올리는 칠통마당이라고 부르는 선창이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신 박사는 개항 후 일반 상품과 벼가 주요 화물이었고, 그 후 정미소가 생기면서 들어오는 벼와 실려 나가는 쌀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1918년 축항이 가동하자 일반 화물과 쌀은 그곳으로 옮겨 갔고 칠통마당은 해주, 연백, 강화와 서산, 당진 같은 여러 곡창에서 벼를 실어 오는 전용 부두가 됐다고 설명했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도 몰려온 남자들은 짐을 지고 여자들은 광주리를 이고 구슬 같은 땀을 흘렸다. 개미처럼 옮겨놓은 볏섬과 쌀가마니가 수북이 쌓여 있는 현장엔 떡장수, 엿장수, 들병장수, 물산 객주와 권업소 거간꾼들의 부지런한 움직임과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넘쳐났다. 순수한 우리말인 칠통마당은 미래의 희망을 안고 모여든 이들의 뜨거운 삶의 현장이었다. 한 세기가 건너간 지금, 칠통마당의 일부인 인천항 내항의 명칭은 ‘1·8부두’를 거쳐 ‘고철부두’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쇳가루·분진 민원이 늘어나자 고철을 북항으로 보낸 후 대형 주차장으로 변신했다. 

칠통마당과 연관돼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김구 선생의 본명은 김창수이다.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해도 치하포에서 ‘스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뒤 체포됐다. 인천감리서로 옮겨진 선생은 미결수로 생활하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세계 역사·지지’ 등 신서적을 읽으며 다른 죄수들을 공부시켜 감옥이 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선생은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를 하며 축항 노역에 동원됐다. 인천항은 밀물과 썰물의 해수면 차이가 10m여서 항상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항구 구축 사업을 했다. 축항 노역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백범일지」에 나와 있다. "이전에 있던 서대문감옥 생활은 ‘누워서 팥떡 먹기’였다. 매일 무거운 흙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오르내리면 반나절 만에 어깨가 붓고 동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돼서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할 정도였지만 같이 쇠사슬을 마주 맨 동료들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일을 했다"고 적혀 있다. 

인천감리서 감옥이 있던 인천시 중구 내동에서 인천항 1부두에 이르는 신포로 700여m는 선생이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묶인 채 축항공사장으로 출역을 다녔던 역사의 현장이다. 모친 곽낙원 여사는 감리서 주변에서 기거하며 객줏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서 얻은 찬밥을 바가지에 담아 아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 날라주며 힘든 옥바라지를 했다. 선생은 1898년 3월의 어두운 밤, 탈옥을 감행했고 인천시는 탈옥로를 대충 추정해 ‘백범로’로 명명해 기념하고 있다. 

중구는 김구와의 인연을 되살린다며 신포동 문화의거리 로터리부터 성신아파트 앞까지 200m 구간을 ‘청년 김구 역사거리’로 정하고, 로터리 부근에 300㎡ 규모의 광장을 조성한 후 김구 선생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씁쓸하다. 개항장 한 세기 전의 자취가 대한제국이 아닌 일제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부끄러운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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