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섬마을선생님연구회 운영위원
이영태 섬마을선생님연구회 운영위원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년)~개로왕 21년(475년) 동안 중국으로 내왕(來往)하는 사신들이 머물던 객관(客館)을 능허대라 한다. 내왕객들은 한나루(大津) 포구에서 배를 타고 중국 등주(登州)로 향했다. 

 능허대 관련 자료가 넉넉지 않은 상태이되, 해당 공간을 방문해 느낀 소회를 남긴 경우가 있어 이것이 공간을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권시(權시, 1604~1672)가 ‘능허대에서 놀다(遊凌虛臺)’라는 시문을 남겼다. 그는 1627년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해 공주(公州)로 내려가기 전까지 인천에 거주했다. 인천과 관련된 시문으로 ‘문학봉에 오르다(登文鶴峯)’, ‘능허대(凌虛臺)’, ‘문학사 벽 위에 걸려 있는 사운(四韻)의 한 수를 발견하다(文鶴寺見壁上書四韻一首)’ 등이 있다.

<능허대에서 놀다(遊凌虛臺)> 

 歲登農事簡(세등농사간) 추수 끝나 농사일 줄고

 秋半野人休(추반야인휴) 가을 깊어 시골 사람 한가롭네

 正當良時暇(정당량시가) 때맞춰 좋은 시절 만났으니

 합追勝地游(합추승지유) 어찌 좋은 경치 찾아 유람하지 않을까

 山盡水窮尾(산진수궁미) 산이 끝난 물가의 끄트머리

 天傾海上喉(천경해상후) 하늘은 기울어 바다 위와 맞닿았네 

 酒료共持설(주료공지설) 막걸리 함께 집어 들고 

 少長與盤遊(소장여반유) 젊은이 늙은이 함께 마음껏 놀아보세

 平地擘蛟頸(평지벽교경) 평평한 땅은 이무기 목덜미를 갈라놓은 듯

 絶형奮虎頭(절형분호두) 끊어진 산비탈은 호랑이 머리를 치켜세운 듯하네

 ………

 遙帆進遙口(요범진요구) 저 멀리 돛단배 항구로 들어오고

 長風落長洲(장풍락장주) 긴 바람은 모래톱으로 불어오네

 潮來宇宙震(조래우주진) 밀물이 되자 우주가 진동하는 듯

 汐返乾坤車酋(석반건곤유) 썰물이 되자 건곤이 구르는 듯

 遣興惟有酒(견흥유유주) 흥을 달래기엔 오직 술뿐이라

 呼杯且相酬(호배차상수) 술잔 찾아 서로에게 따르네

 一酌思正長(일작사정장) 한 잔 술에 생각 길어지자

 황然使人愁(황연사인수) 문득 시름겹기만 하네

 ………

 今日只管醉(금일지관취) 오늘은 단지 노랫소리에 취할 뿐

 請君莫浪憂(청군막랑우) 그대는 괜한 걱정하지 말게

 萬物皆自得(만물개자득) 만물은 모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니

 胡爲獨추추(호위독추추) 어찌 하여 홀로 근심할까

추수 끝난 즈음, 작자는 능허대에 왔다. ‘어찌 좋은 경치 찾아 유람하지 않을까’해서 그곳에 왔던 것이다. ‘산이 끝난 물가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는 능허대는 ‘평평한 땅은 이무기 목덜미를 갈라놓은 듯’하고 ‘끊어진 산비탈은 호랑이 머리를 치켜 세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근경으로 모래톱, 원경으로 돛단배, 더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에 있는 물빛을 조망할 수 있었다. 능허대 밑에서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며 우주를 진동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것이 밀려 나간 뒤에 드러난 갯벌은 건곤(乾坤)이 구를 정도로 광활하기만 했다. 

 능허대에서 바라본 주변은 한마디로 ‘태평성대의 좋은 풍경’이었다. 좋은 풍경(好風景)은 천후(天候)와 물상(物像)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하늘, 바다, 물빛, 돛단배, 밀물, 썰물 등이 자체의 본성대로 운용되고 있었다. 이른바 대상들 스스로 만족(自得)하며 흥(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자가 ‘흥을 달래기엔 오직 술뿐’이라 했는데, 이는 추수철 지나 ‘젊은이 늙은이 함께 마음껏 놀자’는 것 또한 자연의 흥을 좇는 한 방법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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