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길이는 두 자 정도에 폭은 한 자가 채 안 되는 작은 그림이다. 낮은 맞배지붕의 집은 텅 비어 있는 듯 허름하다. 집 좌측에 잣나무 두 그루가, 오른쪽에 잣나무 한 그루가 늙은 소나무 옆에 서 있는 쓸쓸하고 황량한 겨울 풍경이다. 그림의 좌측에 300여 자의 정갈한 글을 썼다.

추사(김정희)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돼 기약없는 유배생활을 할 때인 59세(1844년)에 그린 국보 180호인 세한도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함도, 왕을 원망함도, 홀로 된 고독의 문구도 없다. 덩그런 집 한 채와 네 그루 나무로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추사는 궁중의 내로라하는 전문화가가 아니었다. 시, 서, 화, 전각을 좋아하는 곧은 선비였을 뿐이었다. 

이 그림이 여러 명의 손을 거치고 세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운명을 이기고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면 부춘산거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부춘산거도는 황공망이 1350년 82세 때 3년 동안 그려 제자에게 준 산수화이다. 길이가 7m쯤 되는 대작이다.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다가 명나라 말기 그림을 너무 사랑한 사람의 유언에 의해 불에 타들어 가다가 겨우 건져져 둘로 갈라진 중국이 가장 자랑하는 산수화 중의 하나이다.

세한도는 죄인을 돕다가 적발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시기에 갓끈 떨어진 노구의 선배에게 귀한 중국책을 보내 준 후배 이상적에게 고마움으로 그려 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고 엎드려 읽으며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9명의 손을 거쳐 우리 앞에 선 것도 극적이다. 1943년 일본의 학자가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소전 손재형 님이 수소문해 그 먼 거리를 직접 찾아가 몇 달 동안을 매일 간청해 겨우 받아왔다. 3개월 후 공습으로 그 학자의 서재가 모두 불타 버렸으니 자칫했으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황공망은 가난하게 자랐지만 추사는 가난하지는 않았다. 고조부가 영의정이었고, 증조부는 영조의 사위였으며, 부친은 판서였고, 본인도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황공망도 작은 관직이 있었으나 부정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고, 추사는 두 번이나 유배를 당했다. 

후배에게 고마움을 전하는데 거친 붓질로 어찌 쓸쓸한 겨울에 서 있는 나무를 그렸을까? 벗이라 했던 이들은 등을 돌리고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은 고립무원의 시기였다.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성글어지는 것을 거부한 이상적은 바로 처지가 바뀌어도 한결같은 잣나무였고, 자신도 한결같았지만 이젠 늙어 버린 소나무임을 표현한 것이다. 직관도 중요하지만 느낌으로 보는 그림이 진정한 그림이다.

둘 다 인생 말년의 작품이지만 그린 시기, 크기나 스케일, 화려한 소장자들의 이력 등을 따진다면야 부춘산거도일 것이나 바라만 봐도 깊이와 범위가 무한대인 작품으로서야 어찌 세한도가 뒤지랴.

얼마 전에야 부춘산거도 한정판 영인본을, 나무로 잘 조각된 세한도를 구했다. 곁에 오래 두고 두 위인의 마음을 백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으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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