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봄날이다. 새롭게 시작된다. 모든 생명체에는 ‘체내시계’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개념과 운행이 있으므로 그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2022년 지금 인류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증유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문명사적으로 대변환기(civilization epoch)에 있고,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국제질서의 변화(power shift)가 다시 이뤄진다. 전진과 발전을 위한 혼돈과 방황은 물론이고 삶을 위한 ‘기본 자리’조차 찾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은 근현대사의 문명적인 모순들, 국제 질서의 갈등들, 각종 기술들이 동시에 중첩적으로 적용돼 온 공간이므로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면 한민족은 인류를 대신해서 이 혼란의 상황을 앞서서 경험하는 중인 것 같다. 

 개체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라나 문명, 역사에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 또는 숙명이란 것이 있다. 내가 느끼기에는 한국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대적 소명감이라는 ‘황금굴레’가 살짝살짝 덧씌워져 가는 중인 것 같다. 한국은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초리로 보며, 후발 국가들은 경외심을 갖고 평가할 정도로 경제력뿐만 아니라 군사력, 기술력에 이어 이제는 문화력까지 급성장하는 중이다. 필자는 일찍부터 ‘한민족 역할론’을, 동아지중해의 핵인 한반도의 ‘신문명 심장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핵심으로서 ‘경기만 옹달샘론’을 제안했는데, 그 범경기만의 중핵이 ‘서울’이라는 ‘강해(江海)도시’이다. 

 서울은 ‘메가리전(mega-regeion)’의 개념을 적용해 수도권까지 합하면 인구는 2019년 통계로 2천600만 명 가까이 되고, 면적도 넓다. 경제력 규모도 매우 커서 전국 GRDP(지역내총생산)의 20%가 넘는다. 또한 수도권에 세계 최고의 전자기술력을 갖추고, 일시적으로 후퇴했지만 금융허브의 역할도 높다. 2020년 미국의 ‘글로벌 파이낸셜 매거진’이 선정한 살기 좋은 세계 도시 가운데 8위로 선정됐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분야가 적지 않다. 특히 문화, 문명, 정신 등으로 표현하고 유형화되는 분야는 개선할 점이 많다. 페르시아제국의 페르세폴리스, 그리스 세계의 아테네, 로마제국의 로마, 그리고 파리나 뉴욕 같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내적 토대는 계량화시킬 수 없어 확신은 못하지만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고 느낀다. 한민족의 역사 경험과 문화, 생태환경, 근대 이후에 겪은 남다른 고통과 노력을 감안한 생각이다. 아직은 두껍고 단단하지만 곰팡이가 핀 껍질을 깰 능력은 있는 것 같다. ‘아브락사스(Abraxas)’를 향해 날라가는 ‘헤세’의 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외적인 부분, 즉 서울의 ‘시스템’을 개조(re build, re set, re foundation)하는 일에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스템(system)은 첫째, 산·물·들·하늘 등의 자연, 주거지·건물·도로 등의 인공으로 구성된 공간이 있다. 둘째, 그러한 요소들이 운행하는 과정과 방식이 있다. 그리고 셋째, 인간이 만들고 지향하는 목적까지 포함된 내적 논리가 있다. 그렇다면 서울의 개조는 이러한 시스템의 3가지 요소를 고려해서 적절하게 섞여 유기적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적어도 문화적·문명사적 관점에서는 서울의 생태환경은 몇 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

 서울은 4개의 소산(小山)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또 바깥에 4개의 대산(大山)이 방패처럼 막아섰다. 아늑하고, 안전하며, 수려하고도 강건한 느낌을 주는 태반 같은 공간이며, 사방의 산골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줄기들이 메마른 도시의 안팎을 적셔 준다. 또 백두대간의 마루와 골에서 나온 물줄기들이 모여 가며 500여㎞ 이상을 흘러온 한강이 삼태기처럼 감싸 안으면서 흐르다가 하류에서 임진강물을 더 보태 경기만을 경유해 서해로 들어간다. 내 이론과 용어를 따르면 강과 바다가 만나는 접점, 즉 교통의 나들목에 해당하는 ‘강해(江海)도시’이다. 과거에는 용산을 비롯해 무려 20여 개에 달하는 부두가 있었으므로 내륙의 육로와 강의 물류망 및 해양 물류망이 교차하는 허브(hub)였었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천 영종도 국제공항까지 갖췄다. 그렇다면 다양한 외국 문화들이 섞이는 문화의 ‘항아리(pot)’ 또는 ‘심장(heart)’이 될 가능성은 더욱 높다. 

 나는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하고 싶다. 공간이 가진 정신적인 측면이다. 풍류, 풍수 등 자연을 한몸으로 인식하는 우리에게는 친숙한 부분이다. 때문에 ‘지심학(geo-mentalogy)’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중이다. 서울을 에워싼 바위산들이 지닌 강인하고 옹골찬 기운도 중요하지만, 한강이라는 큰 강이 뿜어내는 맑고 청량한 기운과 부드러운 곡선에 담은 느긋한 마음은 큰 복을 선사한다. 그리고 서해를 품에 안고 태평양까지 확산되는 범경기만과 이어진다. 

 현대인들은 특히 도시인들은 자연과 멀어지고, 넘쳐나는 욕망 때문에 갈증을 느끼며, 소외감과 투쟁심 때문에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산과 강, 더불어 바다까지 어우러진 서울은 사람들이 열기를 식히고, 사고와 사유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사적 소명감을 가진 서울은 도시와 한강, 바다를 포함한 큰 공간을 유기적인 시스템 속에서 개조하는 형태와 방식을 찾고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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