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고려는 후기에 몽골과의 전쟁으로 수도 개경을 떠나 강화도에 제2의 도읍을 정하고 39년간 강도시대(江都時代)를 열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연유로 현재는 거의 터(址)로 남았지만 당시에 궁궐, 산성, 관아 건물, 사찰, 석탑 등 많은 시설물들이 조성됐다.  그 가운데 특히 남한 유일의 고려 왕릉군은 인천을 ‘역사고도(歷史古都)’라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되고 있다. 

고려의 수도 개성지역에는 고려 태조의 무덤 등 20여 기의 왕릉이 현존한다. 고려시대 재위 왕은 모두 34명(대수 36대)인데 무덤 임자가 밝혀진 것은 모두 12기이고, 현재 모습이 알려진 것은 태조 왕건의 현릉(顯陵)과 31대 임금인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쌍릉인 현·정릉(玄陵正陵) 정도이다. 

현재 남한지역의 고려 왕릉은 강화도에 2명의 왕과 2명의 왕비릉이 있고, 공양왕릉이 삼척과 고양시 두 곳에 자리하지만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강화도에는 희종의 석릉(碩陵), 고종의 홍릉(洪陵)과 원종비 정순왕후의 가릉(嘉陵), 강종비의 곤릉(坤陵), 그리고 아직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은 능내리 석실분과 희종비 성평왕후 소릉 등 왕릉급 고분이 있다. 이 가운데 홍릉을 제외한 다른 왕릉들은 진강산 일대에 모여 있다. 

무엇보다 남한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왕비릉을 포함한 고려 왕릉군은 인천이 ‘7대어향(七代御鄕)’이었던 고려시대의 특징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곤릉은 강화 천도 당시 왕이었던 고종의 모후로 고려 22대 강종(康宗)의 비인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의 능이다. 강종 1년(1212)에 왕비로 봉해져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했다가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됐다. 고종 26년(1239) 별세했으며, 고종 40년(1253)에 정강(靖康)의 시호가 더해졌다. 원덕태후는 종실 신안후(信安候) 성(珹)의 딸로 왕실 동성을 피하기 위해 유씨라 했으나 누구의 성을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안후는 현종의 5세손으로 강종과 신안후의 딸은 12촌간이 된다. 그리고 외가로는 더욱 가까운 외4촌 관계가 성립된다. 

가릉은 고종의 맏아들인 고려 24대 원종(元宗)의 왕비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능으로 알려졌다. 순경태후는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로 본관은 경주이고, 무신정권 최고 집정자인 최우의 외손녀다.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에 책봉돼 경목현비(敬穆賢妃)가 됐고, 그 다음 해 충렬왕을 출산한 직후 승하해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전한다. 원종 3년(1262)에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추봉되고, 1274년 아들인 충렬왕이 즉위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됐다. 

충렬왕은 원종 15년(1274)에 원 세조(世祖)의 막내딸에게 장가 들어 원 황실의 사위가 됐는데, 고려 왕실과 원 왕실 사이에 이뤄진 최초의 공식적인 통혼이기도 했다. 공주는 원나라 무종(1310) 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로 추봉됐다. 충렬왕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고 맏아들 원이 후일 충선왕(忠宣王)이 됐다. 

한편, 가릉이 위치한 북편 위쪽으로 또 하나의 왕비릉으로 추정되는 능내리 석실분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 피장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현재 조사된 가릉의 위치나 피장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게 됐다. 

특히 능내리 석실분 출토 유물 중 은제장식편의 봉황 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이라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했지만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 성평왕후(成平王后)의 묘로 추정된다. 성평왕후는 고종 34년(1247) 8월 사망해 소릉(紹陵)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고려사」에는 사망 연도와 능호만 언급될 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희종의 무덤인 석릉이 능내리에 있으므로 그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근대 문화유산의 경우 인천 강화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왕비릉의 사례처럼 발굴과 조사·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는 있지만 시대적 간극(間隙)만큼 아직도 명확히 규명해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실감한다. 그런 시각에서 이제는 인천이 각 지자체마다 보편화된 근현대 산업도시라는 이미지를 벗고 2천40여 년 오랜 역사 속에 발견되는 ‘역사고도(歷史古都) 인천’을 상징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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