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저항시인’, ‘독재에 항거’, ‘민주화의 상징’. 

지난 5월 8일, 결국 세상과 이별하고 만 김지하를 칭하는 세상의 수식어들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젊은 날의 그가 있고, 나이를 들어가면서의 그가 있다. 

젊음을 저만치 떠나보낸 그는 이미 투사가 아니었다. 시인이 아니었다. 운동가가 아니었다. 더더구나 정치인이 아니었다. 역사학자인 내게 그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사상가요, 선지자였다. 

‘地下’가 아닌 ‘芝河’인 그가 쓴 많은 책들과 시집들,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며 그린 ‘난’들에 담긴 것은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씨, 한민족에 대한 진한 애정과 바른 평가 등이었다.

아픈 몸과 구멍난 정신을 이끌고 고구려 땅, 파미르고원, 바이칼호, 안데스산맥, 캄차카반도,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까지 찾아간 것은 우리가, 인류가 지향해야 할 그 무엇의 원형을 찾고, 그 원형에 담긴 우리 사상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는 온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고뇌하고, 고통받으면서 생명사상을 찾아 올렸다. 그것을 현대 언어와 서양 논리, 불교사상으로 풀어내고, 세상의 보편적 진리와 결합시키고자 무지무지하게 애를 쓴 사상가였다.

그만큼 아픈 가족사를, 그것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한국 근현대사의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의 아픔을 태생적으로 갖고 어린 날을 보낸 사람은 거의 없다.

젊은 날의 그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열정을 남달리 추구하면서 사회불의, 권력 독재, 인권 탄압 등 정치적인 억압이 난무하는 시대상황에 양보 없는 저항과 불굴의 투쟁을 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곁을 떠나지 않은 정신적 고통과 망가진 육체로 힘들게 살았다.

더구나 나이 들어가는 그에게(물론 예측했었겠지만) 또 다른 불의로, 권력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붉은 벽돌과 쇠창살 속의 감옥이 있는가 하면, 세상과 병마와 불의로 가득 찬 감옥도 있다.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까망 바위 같은 큰 독재가 있는가 하면, 작은 권력에 매달리는 짱돌 같은 작은 시민권력자들도 허다하다.

악랄하고 교활한 소수의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우매하고 탐욕 때문에 우상에 열광하는 대중들도 있다.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좌우의 지식인들과 예술인들, 자칭 운동가들까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괴롭혀댔다. 그의 생각과 말, 행보를 자신들이 만든 이념의 틀 속에 밀어넣고, 사회적인 이익과 정치적인 행보와 연관시켜 가면서 비판, 음해, 심지어는 위협까지 해댔다.

그는 이런 모든 것들을 매우 못 마땅해했고, 걱정했고, 때로는 분노했다. 그에게 ‘타는 목마름’이란 종류와 편을 가르지 않는 모든 종류의 ‘자유’였고, 가리지 않는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상 ‘선생’이었다.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뭔가 싹수가 있어 보이는, 자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말을 꺼냈다. 

한 번 꺼내면 그칠 줄을 몰랐고, 간혹 거친 소리도 섞어서 형수님한테 핀잔도 맞았다. 말 자체가 아니라 자기 생각,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사람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책으로, 시로, 그림으로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서 말을 양껏 하려 하는 것이다.

자기가 안 것을 진심으로 전달하고 싶었고, 자기 말이 씨앗이 돼서 언젠가는 ‘妙(묘)’한 꽃으로 피어날 것을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부지런했고, 집념이 강했다. 불편한 몸을 끌고서 줄기차게 여러 산길과 골짜기, 강을 보고 답사했었다.

나는 그가 사는 곳을 옮기면 쫓아서 찾아 다녔다. 처음에는 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듣지만, 거의 대부분은 반강제적으로 끌려 나왔다. 그러면 원주, 제천 주변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정선의 남한강 어느 마을에 꽂혀 먼 걸음도 자주 했다. 

나는 안다. 당신이 다시 보고 싶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려던 마음도 있었겠지만, 실은 뭔가 전달하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나와 대동한 학자들만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 갔던 곳을 또 가면서도 새 방문자들에게 같은 얘기를 열심히 큰소리로 했다. 차 안에서, 현장에서, 그리고 자주 가는 지역에는 꼭 있는 단골 음식점에서. 

문제는 혼자서 다닐 때였다. 전속(?) 택시 운전기사가 있을 정도였으니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가졌지만, 골격이 크고 장군 눈썹과 호랑이 눈을 가진 그는 실눈을 만들고 너털웃음을 지면서 이렇게 말할 때도 있었다. 

"이 사람아. 나 마누라 몰래 택시를 대절해서 답사 다니다가 또 ‘쿠사리’를 맞었어."

나도 그렇지만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누구나 놀라고 탄복해 한다. 아는 게 너무 많다는 점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아니 내가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았나?"하며 자괴심이 들게 된다.

엄청난 독서량 탓도 있지만, 실은 특별한 행위를 통한 통찰력 때문이다.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알았고, 자기만의 해석을 했고, 자기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전문학자들도 모르는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두타산 일대의 사라진 예맥인들, 제천과 원주 등의 곳곳에 숨겨진 궁예 흔적들, 그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 해월 최시형과 동학의 사연들 등.

실은 역사학자인 나조차 잘 몰랐거나 수긍하기 힘든 얘기들도 많았다. 그러니 "아, 참. 대단하다. 이 또한 운명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때때로 입술을 씰룩거리며 하는 몇 가지 단골말이 있다.

그가 ‘호호’ 생명을 불어넣어 새롭게 탄생했고, 앞으로 많은 쓰임새가 있을 것들이다. 생명, 밥, 우주생명학, 천부경, 기연 묘연, 화엄, 상호호혜, 신시경제, 홍익인간, 여인, 수왕, 모심, 살림, 시김 등 등이다. 그리고 ‘그늘’이다. 양지도 아닌 음지도 아닌, 어둠도 아닌 광명도 아닌, 그늘.

그는 그늘의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돼서, 또 ‘검은 그늘’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통념을 변화시키려고 꼭 ‘흰 그늘’을 함께 말했다.

사시장철 입는 개량 한복의 적삼을 뒤척거리면서 "이보게. 이렇게 ‘안팍’의 관계이네." 하면서 ‘흰 그늘’, ‘검은 그늘’을 나누고, 둘의 다시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게 ‘밥’이고, ‘생명’이고, ‘사람’이었다.

형수님(사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는 절망감에 힘들어했지만 다시 그림을 그렸고, 의욕을 보이면서 다신 안 쓴다는 책을 또 쓰겠다고 했다.

코로나가 발생하면서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반 년쯤 전에 혹시나 하며 찾아갔지만, 집 밖에서 큰소리로 "선배님, 저 명철이 왔어요"라고 외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담장을 간신히 넘어오다 멈춰 버리는 힘든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을 떨궜다.

어제 아내와 뒷동산을 산책하며 "이 양반.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며 ‘김지하’ 얘기를 나눴는데, 바로 그 시간에 그는 세상을 떴다. 예측했지만, 너무 빨리.

어제 해가 중천에 뜰 무렵 평생 괴롭혔던 몸뚱이가 그늘진 흙 속에 누여졌다.

그리고 땅거미가 세상에 그늘을 드리울 무렵 여리고 착한 순수한 넋이 그가 자주 말하던 구멍들을 빠져나와 이승의 헐은 허물을 벗으며 ‘흰 나비’로 변했겠지. 그러면 빈 몸, 빈 마음으로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를 만끽하며 맑은 하늘로 사쁜사쁜 나래짓 했겠지.

아직은 검은 그늘에 더 머물러야 할 나는 역사를 넘어서는 ‘그 터’에서 언젠가는 부활할 그의 ‘생명’을 떠올리며 채비를 해야겠지. 그가 나와 세상에 뿌려댄 씨앗들이 하얗게 움트는 모습들을 고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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