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수 동산중학교 교장
황규수 동산중학교 교장

5월은 ‘가정의 달’로 일컬어진다.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의 기념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버이날 하면 당연히 어머니를 떠올리던 것에서 아버지로 그 대상의 폭이 넓어지게 됐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어버이날이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기념해 제정한 날이지만, 이전의 ‘어머니날’을 확대해 정한 날이기 때문인 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우리나라 현대시에서도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시의 제재로 취하고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관심을 끄는 시 중 하나는 박목월의 ‘가정(家庭)’이다.

"지상(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玄關)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詩人)의 가정(家庭)에는/ 알 전등(電燈)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微笑)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地上)./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地上)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存在)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시 ‘가정’ 전문)

이 시에는 굴욕과 굶주림의 고통스러운 현실 상황에서도 미소하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가장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쌍하고 가련하며 어설프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강아지 같이 귀여운 자식들 덕분에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상대적으로 자식의 입장에서 얼마나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의 삶에 대해 이해하려 했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늦게나마 아버지의 지난 삶에 대해 되돌려 볼 때마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슴이 시려옴을 느끼게 된다. 

필자의 어린 시절 아버지라는 이름의 그는, 체신공무원으로 사무관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한창 일할 나이인 50대 초반에 상부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한 것은 1974년 자식의 유신 반대 집회 참여로 인한 구속 때문이었다. 지금 필자의 나이보다 젊었을 때인 당시 6남매의 가장으로 예상치 못한 실직을, 그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세칭 일류 대학의 의대생이었던 자식이,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감옥으로 향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밥 대신 술로 연명하다시피 한 그는 시골로 가서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평생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살던 그가 그 일로 가정의 생계를 꾸려 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후 그가 택한 일은 ‘김포상회’라는 상호의 이른바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때 중학생이었던 필자는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도와 내 몸보다 더 큰 자전거를 타고 도매상에서 라면이나 음료수 등의 물건을 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수업료를 세 차례나 연속해 못 낼 정도로 궁핍함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이후 자식들이 성장해 제 밥벌이를 하게 되며 아버지는 일을 안 하셔도 됐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진 점도 있지만, 지병 때문이기도 했다. 

이처럼 박목월의 시 ‘가정’에 비춰 나는 아버지에게 얼마나 미소를 짓게 해 드렸을까 생각해 본다. 미소는커녕 마음에 상처를 드리지는 않았을까? 아버지는 필자의 첫째 아이가 첫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내가 아비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빠른 시기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드리거나 넉넉히 용돈을 드리지도 못한 점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묵하신 아버지께서 어느 날 "말하기 전에는 꼭 세 번 생각하라"고 하신 그 가르침은, 지금도 필자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