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공사현장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전시가 지난해 11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다. 금속활자들이 담겨 있던 깨진 항아리도 전시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출토된 금속활자는 1434년 주조된 갑인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1436년 인쇄된 「자치통감」·「대학연의」·「근사록」 등의 서체와 유사해 갑인자로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시력이 나빠진 세종이 활자를 크고 단정하게 제작해 서적을 인쇄하라고 집현전 김돈에게 지시해 주조된 것이 갑인자다. 「자치통감」·「대학연의」·「근사록」을 갑인자로 인쇄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추정과는 전혀 다른 학술 자료가 있어 주요 내용만 소개하려고 한다. 

조선시대 한자 금속활자가 최초로 제작된 건 1392년 임신자다. 1403년엔 계미자가 제작된다. 1420년에는 경자자가 제작됐다. 1424년 갑진자, 1434년 갑인자, 1452년 임신자, 1455년 을해자, 1465년 을유자, 1469년에는 세조의 필적을 자의본으로 해 납활자가 제작된다. 1471년 왕안석·구양수·옥경공집의 자를 본으로 해서 신묘자가 제작됐다. 1493년 중국 명나라의 「자치통감」·「강목훈의」의 자를 본으로 해서 계축자가 제작됐고, 1519년에는 기묘자가 제작된다. 1668년 무신자가 제작됐고, 1772년에는 평안도 관찰사 서호수에게 명해 한구자가 제작된다. 

이러한 활자들로 인쇄된 서책들은 무엇이 있는지 지면 관계로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겠다. 자료에서는 조선시대 활자판 중에 가장 오래된 서책은 1403년 고주·시전·서전·좌씨전 등을 자의 본으로 제작된 계미자로 인쇄한 「공자가어」·「예기천견록」이 있다. 1420년의 경자자로는 「자치통감」·「강목속편」·「노을대」·「박통사」가 인쇄됐다. 인사동 공사현장에서 출토된 금속활자를 갑인자로 추정하고 있는데, 갑인자의 서책은 「명신언행록」·「국조보감」을 인쇄했다. 갑인자는 위부인자로도 불렸다. 위부인의 필적과 비슷해서다. 위부인은 중국 진나라 이충의 모친인데, 왕희지의 서체를 배웠다고 한다. 

임신자로는 「입학도보설」을, 계미자로는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를 인쇄했다. 이 서책에는 본문과 주소에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 인쇄했다고 한다.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해 대중들에게 보시하는 서책이었다고 한다. 을유자로는 「원각경」이 인쇄되고, 세조 때의 납활자로는 세종~문종의 실록을 인쇄했다. 기묘자로는 「통역여훈」이 인쇄된다. 선조 때의 나무활자로는 「창이사찬실록교사섭요」를 인쇄하고, 실록자·무신자로는 현종~철종의 실록·「정관정요」를 인쇄한다. 

숙종 때의 평양 사람 한구의 필적을 자의 본으로 제작된 활자로는 「소자강목」이 인쇄된다. 영조 때는 임신자로 「경서정문」·「계몽집첩」을 인쇄한다. 정조 때의 정유자로 「소학」·「향례합편」·「대학류의」·「대학언해」·「정리의궤」·「오륜행실」·「효순사실」을 인쇄했다. 갑인자로 1772년 「심경만명회춘」을 인쇄하고 이 서책의 자를 본으로 해서 정유자가 제작된다. 1910년 우리 역사 기간인 고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모든 시들을 모아 펴낸 「청구시초」도 갑인자로 인쇄됐다. 

우리의 합금 기술로 중국 학술전집이 인쇄된 쾌거도 있었다. 1725년 중국에서 「고금도서집성」이 인쇄된다. 서책이 1만 권이고 목록을 안내하는 책만도 40권이 된다. 진몽뢰라는 개인 혼자 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의 모든 자료들을 모아 완성시킨 중국 학술전집이다. 엄청난 규모의 서책을 완성시켰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고금도서집성」을 일본은 1764년에 구입하고, 조선에는 1776년 정조 임금이 서호수에게 명해 구입해 들여오게 된다. 중국에는 여러 재난으로 원서의 전본이 드물다고 하는 서책이다. 「고금도서집성」을 인쇄한 동활자가 조선인 김간이라는 사람이 주조·제작한 활자였다. 인사동 공사현장에서 출토된 금속활자가 경자자인지 갑인자인지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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