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사무국장
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사무국장

 요즘 교동도는 인천에서 핫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각종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주말이면 교동도를 찾는 이들의 차량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이처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된 데에는 2014년 개통된 교동대교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교동도를 찾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강화 인화리 검문소에서 출입허가증을 받고 교동대교 입구에서 다시 확인을 받아야 했다. 그것이 올해부터는 교동대교 앞에서 출입허가를 받는 것으로 절차는 줄어들었으나, 도로가 비좁은 관계로 주말이면 대기하는 차량이 너무 많아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민통선’이라는 남북 분단의 산물이 존재하는 우리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개선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교동도를 처음 찾은 것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당시 서울 양천구에서 살던 필자가 무슨 생각으로 특별한 연고도 없는 그곳에 가려고 했는지 지금도 아득하다. 당시 교동도 가는 길은 참 멀고도 멀었다. 그것은 단지 공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한몫했다. 버스를 3번 갈아타고 도착한 강화도의 창후리 포구, 그런데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입도허가증을 작성해야만 했다. 선착장 입구에서 허가증을 확인 받은 후 비로소 승선해 조강(祖江)을 건너 도착한 월선포,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지석리에 위치한 전망대를 찾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약주만 드셨다 하면 "가련다 떠나련다~"(유정천리)를 부르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땅이 망원경으로 볼 필요도 없이 너무도 가깝게 보였던 기억이 새롭다.

 "은행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은행나무 한 그루를/ 화개산 약수터에 심었다던,/ 꼿꼿하고 경우 바르던 추씨(推氏) 아저씨/ 악센트가, 이북이 고향이라 했다.// 은행나무가 자라면 키가 장송(長松)처럼/ 커서, 황해도 연백 뜰 고향집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고집 하나로 살아왔다며/ 손등으로 구슬땀을 훔치던 추씨 아저씨/ 늙어 화개산만 쳐다보다/ 돌아가셨다// 앉은걸음이라도 꼭 한 번/ 올라 가 보고 싶다고 하시던 아저씨// 정말 은행나무가 되어/ 고향집 용마루를 망연히/ 굽어보고 계신다." (석천(石泉), ‘샘터지기’)

 몇 년 전 화개산 산행 중 정상 부근 약수터 앞 나무에서 봤던 작품이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준비 없이 오르다 보니 갈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즈음 나타난 약수터는 육체적 갈증을 풀어줌은 물론 머릿속까지 맑게 해 줬다. 시인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었는데, 최근 교동의 시인 석촌 김흥기의 정원을 소개하는 사이트들이 눈에 띈다. 시인의 다른 작품들과 정원이 소개돼 있었다. 

 최근 화개산 정상에는 모노레일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일부 등산로가 폐쇄됐다.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260m 정도의 산을 훼손하면서까지 꼭 이런 시설이 들어서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때는 방치돼 있던 섬 교동도가 이제는 난개발에 놓여 있는 듯하다. 교동도가 꾸는 꿈은 어떤 모습일까. 

 이세기의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의 한 대목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섬은 섬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섬만큼은 비사유화의 영역이 되기를 바란다. 섬이 사유화되는 순간 만인이 누려야 할 공공성은 사라진다. 섬사람들은 머지않아 발 딛고 선 자기 땅에서 추방되어야 할 운명을 겪어야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섬 고유의 토착종들이 사라진 자리에 외래종이 이식되고 있으며, 천혜의 원시림은 파헤쳐지고 수억 년을 지켜 온 섬둘레인 ‘갯티’는 망가지고 있다. 섬을 황폐화의 길로 내모느냐, 아니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섬답게 보존하느냐는 오로지 오랫동안 정주하며 삶을 일구어 온 섬 주민들이 결정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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