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현 경기대 겸임교수
장종현 경기대 겸임교수

# 2차 대전 후의 냉전시대와 미국 중심 세계 질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비극이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도래한 냉전시대는 소련 붕괴까지 이어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약소국가들조차 국경선은 거의 변경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인구 100만 명이 되지도 않은 작은 국가들도 국방력이 전혀 뒷받침되지 않음에도 자신들의 주권과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미소의 극단적 체제 경쟁이 상호 확증 파괴의 공포와 함께 약소국의 국가 안위에 좋은 방패막이가 됐던 셈이고, 이로 인해 2차 대전 종전 이후 국가 간 국경선 변경은 식민지 국가 독립 등 극히 예외적 경우가 아니면 사실상 변화가 없는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이 세계의 유일한 리딩 국가로 당분간 국제 질서의 변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미국의 리더십에 반발하는 시리아·아프가니스탄 등 많은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등 극단의 대치로 규정할 수 있는 냉전시대보다 더 많은 국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급부상한 중국이 G2 국가를 자처하며 미중 간 갈등이 세계의 산업구조와 군사동맹구조를 크게 번화시키고 있다. 

미중의 G2 구조 하에서 2000년대 이후 의외의 실리를 얻은 국가는 러시아로,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으로 한국보다 약간 적지만 군사적으로는 미국 다음의 세계 2위 국가로 2020년 이후 미국의 철수를 가져온 시리아를 위성국가로 삼은 것은 물론 친중으로 기울던 구소련의 카자흐스탄에도 2022년 초 러시아 특공대 투입으로 친러정권을 공고히 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군사침공해 2014년 병합했고, 역시 구소련 조지아와의 국경 분쟁에서 남오세티아를 지원해 친러 괴뢰정권을 수립함은 물론 정서적으로 독일에 대한 저항감이 강한 유럽의 벨라루스를 사실상 위성국가화해 국가 통합 단계에 이르는 등 그야말로 실속이 있는 군사작전으로 재미를 크게 보고 있다. 

# Kleptocracy와 Irredentism에 근거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최근 들어 정치학자들에게도 생소한 단어인 Kleptocracy(깡패정치)와 Irredentism(실지회복)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Kleptocracy는 합법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독재적 행태를 띠는 정치 행태를 말하며, Irredentism은 19세기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일한 민족이 타국의 정치 지배 하에 있어 이를 회복하려는 운동에서 유래한 단어로 우리민 족의 다물과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청산해야 할 정치문화로 다수에 의한 정치적 폭주를 반지성주의로 언급했는데, 이 역시 광의의 의미에서 Kleptocracy로 볼 수 있다. 

2022년 2월 24일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Irredentism에 근거해 러시아는 중세시대인 9세기부터 한 나라라는 기이한 논리로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했고, 문화적·역사적 동질성을 내세우며 무력 침공을 정당화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거의 유일하게 실지회복 논리로 독립한 이스라엘은 2천 년 전 조상의 땅이라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몰아내고 독립국을 건설했으며, 이로 인해 중동은 아직도 일촉즉발의 화약고로 남아 있다. 

카자흐스탄·시리아, 크림반도 등 잇따른 국지전에서 승리하며 국력을 과신한 러시아는 당초 침공의 최적기라는 한겨울을 피해 동맹국인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후원하며 2월 말 침공에도 불구 3일 이내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받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 같은 러시아의 과신은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먼저 도피할 것으로 판단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하벙커 투혼으로 우크라이나 항전과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부상함은 물론,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NATO에 대한 침공으로 인식한 미국과 서유럽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으로 전쟁 발발 후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러시아는 아무런 실익도 얻지 못한 채 지리한 장기전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도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붕괴 이후 줄곧 러시아의 국가수반으로 재임하고 있으며, 과거 공산주의 체제의 독재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 80% 이상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모든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으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헌법을 개정해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종신 집권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중동의 경우 절대왕권 기반의 사우디·UAE·요르단 등은 국제 질서에 순응하는 안정된 국가 운영을 이루고 있는 반면, 국민투표를 통한 선거로 만든 정권인 이란·리비아·레바논·베네수엘라 등은 극심한 내정 혼란은 물론 세계 난민의 주원인으로 등장하는 등 주변 국가에 적지 않은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2차 대전의 원흉으로 세계 폭력 지도자의 상징인 히틀러 역시 이 같은 Kletocracy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깡패정치까지로는 분류하지 않으나 극우파적 성격의 트럼프 전 대통령, 필리핀 마약 거래상에 대한 적극적 총기 사용을 독려한 두테르테 대통령, 동구권 붕괴 후 최고 지도자인 총리를 지속 연임하고 있는 오르반 총리 역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 이익 우선으로 국제 질서에 반하는 정책을 아무 거리낌없이 수행하고 있다. 

얼마 전 끝난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세계는 크게 안도했는데, 반이민 등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르펜이 결선투표에서 근소한 표차로 마크롱에게 패해 이번에는 국가지도자 등극에 실패했으나 차기에는 언제라도 극우민족주의가 부상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프랑스는 물론 서유럽 대부분 국가에 엄습하는 등 국제 관계의 정글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1차 대전에서 패전해 많은 영토를 상실한 터키 역시 에르도안 대통령의 터키 민족주의를 슬로건으로 아제르바이잔과 신장 위구르 지역을 통합한 터키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국제사회를 긴장시키는 등 냉전시대와는 다른 형태의 시도가 지구촌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 

# 지리적 중간국으로서의 한국

국제 질서의 정글의 시대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국가의 위상이 급부상하며 강대국의 러브콜과 경우에 따라서는 강한 견제에 시달리는 국가들을 지리적 중간국으로 정의한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로 러시아의 대서양 진출 통로인 보스포루스해협을 장악하고 있는 터키, 중국의 남진을 통한 인도양 진출의 요로를 장악하는 인도, 세계 석유 수출시장의 60% 이상이 통과하는 호르무즈해협을 장악한 이란, 러시아의 서유럽 진출에 대한 저항선인 폴란드, 유럽과 아시아의 석유와 수출입 물동량이 통과하는 믈라카해협의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중국의 동중국해에 대한 영해권 확보에 저항선인 베트남과 필리핀 등이 대표적 중간국으로 부상한다.

한반도 역시 세계 5위 이내의 경제, 군사강대국인 중국·러시아·일본 등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대표적 지리적 중간국으로, 국제적으로 많은 러브콜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의 사드 설치 보복 등으로 본의 아닌 경제적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에 대한 저항선으로 한반도의 지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선조들이 지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길목에 자리잡아 요즘이야말로 조상님들 덕에 1인당 국민소득 3만5천 달러 수준의 G7급 선진국으로 부상하는 행운을 톡톡히 누리고 있고,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 국제 질서의 정글의 법칙에 대응하는 한국의 과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과 미군의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에서의 급작스러운 철수 등은 과거 냉전시대와는 달리 심각한 분쟁지역이라도 국가 간 실익이 없는 경우 국제적 지지는 기대하기 곤란하며, 국가 이익이 필요한 경우에는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굴복시키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 정신으로 회귀하고 있다. 

한국에 앞으로 예상되는 변수로는 최근 코로나 사태로 비상사태에 준하는 전면적 이동 제한과 식량난 등 극심한 체제 불안을 겪는 북한의 체제가 흔들릴 경우 인접국인 러시아·중국의 Irredentism에 근거한 영향력 확보 시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세계 G2라고 자처하는 중국은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 지역의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과 한국전쟁 참전, 경제적 유대관계 등을 이유로 북한을 위성국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으며, 러시아도 이순신 장군이 지킨 압록강 하구의 섬인 녹둔도와 많은 한국계 유민이 많이 사는 극동 연해주 지역과 사할린 교민 이슈, 일본과도 역시 최근 일각에서 제기하는 대마도 이슈와 과거사 청산 등 주변국과는 풀어야 할 정치적·역사적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같이 까딱 방심하면 한순간에 국가 자체가 폭망할 수 있는 급박한 국제 질서에서 출범한 한국의 신정부에 필요한 역량은 민주투쟁의 선명성과 사상적 극단주의 경쟁이 아니라 철저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국제 질서의 변화를 정확히 포착해 슬기롭게 대응하지 않고서는 국가 발전은커녕 국가 안위를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한 식견과 역량 있는 전문가로 포진한 활기찬 새 정부가 구성되기를 촉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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