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고려시대의 무덤은 왕릉, 귀족 및 상류층의 분묘, 일반인의 무덤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왕실과 상류층은 돌방무덤(석실)을 썼고 하급 관리는 작은 돌널무덤(석관)을 만들었던 반면, 일반인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목관을 묻는 움무덤이나 간단한 돌덧널무덤(석곽묘)을 사용했다. 한편, 불교가 크게 성행하면서 상류층에서는 화장한 후 뼈만 묻는 석관묘를 많이 썼다. 

고려시대의 장법(葬法)은 대체로 통일신라 때부터 이어져 무덤 유구(遺構)나 유물로 전해진다. 시신을 일정한 장소에 일정 기간 안치(安置) 또는 매장했다가 유골(遺骨)을 수습해 정식으로 안장(安葬)했는데, 시체를 바로펴묻기(伸展葬), 화장(火葬), 풍장(風葬) 등을 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 중 일반적인 것이 신전장과 화장이다. 풍장은 일부 서인층과 하층민이 사용한 장법으로, 유행병에 의해 사망했을 경우 간혹 시신을 들에 내다버리는 유기장(遺棄葬)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왕과 왕비는 매장이 원칙이었다. 고려 국왕은 사후 왕릉에 묻기까지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는 ‘이일역월법(以日易月法)’을 사용해 27일의 짧은 기간 동안 왕릉을 조성했기 때문에 고려 왕릉은 규모가 작고 상설도 소략하게 제작됐다. 

고려에서 국왕의 시신을 모신 무덤을 부르는 명칭은 시기마다 조금씩 달랐다. 태조(943년)와 경종(981년) 때는 ‘원릉(園陵)’이라 불렀고, 정종(1046년)이나 순종(1083년) 때는 ‘산릉(山陵)’이라고도 불렀다. 

고려는 제1대부터 제24대 원종까지 국왕의 사후 묘호와 능호를 올렸으며, 왕비의 경우에도 능호를 올렸다. 그리고 태조의 부모와 조부모 및 국왕의 생부를 추존해 묘호와 능호를 올려 총 87의 능호를 가진 왕릉이 존재했다. 이 점은 이전의 신라와 다른 황제국을 지향한 고려의 특성으로, 조선 왕릉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

그러나 몽골항쟁 이후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묘호가 바뀌게 됐다. 충렬왕부터 중국에서 시호를 내리게 돼 왕호 앞의 시자(諡字)에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충(忠)’자를 넣었다. 원은 고종과 원종에게도 시호를 추증해 ‘충헌(忠憲)’과 ‘충경(忠敬)’이라 했다. 이들 왕릉의 특징은 입지 조건, 봉분의 규모와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 구조, 능 앞에 배치되는 석물(石物)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석물은 석실을 보호하고 피장자의 위치를 가늠하게 해 주는 것으로 왕릉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중요한 요소였다. 

강화도에 조성됐던 왕릉 석물의 특징 중 하나는 구조의 간소화다. 석실 위로 올려진 8각 혹은 12각 호석은 병풍석이 퇴화된 형식으로 추정된다. 이전 시기 병풍석의 사례는 신라 왕릉과 개성 소재 고려 왕릉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2지신상을 새긴 12개의 탱석과 면석, 갑석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 석인상(石人像)은 모두 사각기둥 형태로 하체의 표현이 거의 없고 얼굴 조각에만 신경을 쓴 중기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크기는 개경 환도 이후의 것에 비해 두드러지게 작다. 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수(石獸)는 가릉에서 2기, 능내리석실분에서 2기, 곤릉에서 1기가 확인됐으며 종류는 다양하다. 가릉에서 확인된 석수는 석호(石虎), 곤릉은 석양(石羊), 능내리석실분은 석구(石狗)로 추정된다. 

강도(江都)시기에 조영된 왕릉은 개성의 왕릉제도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봉분의 규모를 상당히 줄였다. 검소하게 조성된 것은 개경 환도(還都) 이후에 천장(遷葬)할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석실 축조 및 능역 조성 등에 있어 일정한 규칙이 적용됐고, 이는 당시 규범화된 왕릉제도의 영향으로 보인다. 석물 역시 왕릉제도 아래 제작·배치됐을 것으로 보이며 전후 시기와 비교해 볼 때 변화된 양상이 확인된다. 전반적으로 왕릉 구조의 단순화는 강도시기만의 특징이 아니라 고려 왕조 전 시기의 특징이다. 즉, 고려시대에는 능묘의 외관을 꾸미는 데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특히 강도시기에 여건상보다 더 간소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묘제와 왕릉 조성에 따른 제반사항의 변화 등 역사적 사실들이 인천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강화 왕릉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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