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민들이 다시 한번 도성훈 현 인천시교육감에게 미래를 맡겼다. 도 당선자는 그 어느 때보다 흠집내기로 얼룩졌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결국 축배를 들었다. 지난 4년에 이어 앞으로 4년간 인천교육을 이끌게 됐다.

보수진영의 탄탄한 결집에 다소 휘청거렸지만 결국 선택 받았다. 시민들은 그간 그려 왔던 인천교육 청사진의 밑그림을 마무리하고 색칠할 기회마저 도 당선자에게 부여했다.

앞으로 4년, 도 당선자는 시민의 명으로 자신이 펼치려 했던 인천 미래의 발판과 교육의 틀을 완성시키는 막중한 중책을 맡게 됐다. 인수위를 꾸릴 필요도 없다. 곧바로 업무에 복귀해 시민들의 부름과 바람에 응답하는 일만 남았다.

유년 시절 도성훈.
유년 시절 도성훈.

# 어린 시절 도성훈

 도 당선자는 1960년 12월 10일 충남 천안시 목천읍 석천리 작은 산골마을에서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궁핍한 산골에서 벗어나려고 강원도 철암의 주물공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부모와 떨어져야만 했고, 부모의 사랑이 가장 고팠던 시절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다.

 부모가 강원도 태백 철암에서 인천시 부평구로 옮겨 정착하면서 그의 나이 10살 때 인천부평남초등학교로 전학했고, 부평동중학교와 부평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천사람’이 됐다.

 1979년 서슬퍼런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중앙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박정희의 죽음으로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가 분출됐고, 학내 시위도 빈번해졌지만 그는 시위 학생들이 사복경찰에게 얻어 맞으며 잡혀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소심한 청년이었다.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화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 2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해 1985년 2월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한 뒤 강화도 출신으로 영등포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내 김인숙 씨를 운명처럼 만나 1985년 7월 약혼하고, 이듬해 1월 결혼식을 올렸다.

 1985년 3월 성헌고등학교(현 인제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재단 비리와 파행적인 학교 운영에 맞서 평교사협의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을 맡아 학교 정상화 투쟁을 벌였고, 평교사협의회의 요구가 수용되는 승리를 견인했다.

 이후 의문의 도난사건을 빌미로 시작된 탄압에 맞서 학교 민주화투쟁을 주도하다 파면돼 성헌고 학생들을 비롯해 학부모들과 함께 징계 철회 투쟁을 벌였고 농성 23일 만에 승리했다. 

전교조 해직자 복직 투쟁 때 모습.
전교조 해직자 복직 투쟁 때 모습.

 # 교육운동가

 1989년 6월 10일 인천대학교 대학원 강당에서 교사 8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전교조 인천지부 결성을 주도했던 도 당선자는 전교조 가입 활동 등을 이유로 1989년 8월 1일 해직당했다.

 해직교사 시절 전교조 인천지부 사무국장과 수석부지부장, 국공립중등지회장 등을 역임하며 해직자 복직 투쟁을 전개했다.

 전교조 합법화 방침에 따라 1994년 4월 복직해 관교중·인천여공고에서 교사생활을 한 뒤 1999년부터 1년 반 동안 전교조 인천지부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그는 33년간 교육현장을 지킨 교사 출신이다. 1985년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 교사로 학교민주화와 교육민주화, 참교육을 실천하며 아이들과 함께한 교육운동가다. 또 민주노조 운동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인천 노동자, 서민들의 아픔과 늘 함께하고 연대했다. 

 도 당선자는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 전교조 인천지부장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11·12대 지부장을 역임했다. 지부장 임기를 마치고 부개고를 거쳐 2012년 동인천고, 2016년 인천형 혁신학교 행복배움학교 동암중 교장으로 취임해 학교 혁신에 앞장섰다.

도성훈 부부.
도성훈 부부.

 # 교육철학

 도 당선자는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 준 할아버지를 보며 교육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일깨워 주려 노력했던 조부의 가르침은 도 당선자의 머릿속에 항상 자리했고, 결국 누군가의 스승이 되는 일이 보람되다고 느껴 결국 대학시절 교직을 이수하며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상술했듯, 1981년 해직 당했다가 전교조 합법화 방침에 따라 1994년 복직해 관교중, 인천여자공고(현 인천뷰티예술고)에서 교사생활을 한 도 당선자는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학생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기쁨이 크다는 사실을 느끼고 교육행정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도 당선자는 인천형 혁신학교인 ‘행복배움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학부모·교직원·마을 주민이 한마음으로 소통하고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을 위해 같이 노력하는 마을교육공동체의 전형을 만들었다.

 그의 교육관은 ‘행복해야 교육이며, 교육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행복교육의 시작’이다. 또 살면서 ‘신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 ‘신의’는 교육현장 곳곳에서 교사·학부모·학생과 단단하게 맺어질 약속의 바탕이라고 말한다.

 그간 지켜온 ‘신의’와 이뤄 놓은 배움터를 앞으로의 4년 튼튼하게 다져 잡아야 한다고 도 당선자는 다짐한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도 당선자는 ‘기회는 균등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평등교육 실현’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고, 당시에도 ‘혁신미래교육’, ‘안심교육’, ‘소통교육’, ‘평등교육’ 시대를 열겠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모두 그의 교육철학 뿌리에서 뿜어져 나온 공약들로, 이번 선거에서도 그 뿌리는 같았다.

도성훈 민주진보교육감 단일후보 추대 기자회견.
도성훈 민주진보교육감 단일후보 추대 기자회견.

 # 미래 인천교육

 도 당선자가 민선3기 인천시교육감 선거 때 내세운 핵심 공약은 바로 ‘무상교육’이다. ‘기회는 균등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평등교육’을 시행하겠다는 목표 아래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무상의무교육’을 시행하고자 했으며, 결국 이뤄 냈다.

 고등학교 1학년을 시작으로 무상교육을 시행해 중고생 교육비를 전액 지원한다던 그의 공약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또 그렇게 해냈다.

 특히 형편과 상황이 어려운 학교에 더 많은 지원이 가도록 학교균형발전예산 100억 원 확보와 함께 유치원과 초등돌봄교실 확대 등을 내걸었고, 이마저도 쉽지 않았지만 이뤄 냈다.

 도 당선자는 "저는 지난 4년간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며 "현장 교사로 출발해 오늘까지 저의 꿈은 인천교육의 미래와 인천 아이들의 행복한 꿈 외에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했다.

 특히 코로나19를 처음부터 겪은 교육감으로서 앞으로의 팬데믹에도 차질 없는 교육을 이어가는 경험치를 얻었다고 자부한다.

 그간 코로나19로 기초학력 부진이 심화되고 학력 격차가 벌어져 사교육이 늘어나는 부정적 효과가 난무했지만, 기초학력 신장을 위해 진단평가를 강화하는 등 대안이 마련됐다고 주장한다.

 도 당선자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기초학력이 다소 낮아졌다고 교육부가 발표했지만 이는 등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나타난 단순한 현상일 뿐, 그동안 학습결손 회복을 중심으로 한 교육 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며 "초등학교에 기초학력 전담교사를 배치했고, ‘느린 학습자’ 지원을 위한 민·관·학 기초문해력 프로그램과 ‘배움이 자라는 학력 튼튼 여름·겨울학교’, ‘초등학교 국어·수학 1수업 2교사제 강화’ 등 개별 맞춤형 교육도 진행했다"고 대응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 "어떤 상황이 닥쳐도 같은 수준의 학습환경을 제공하고자 인공지능(AI) 튜터를 도입하는 등 학력 향상을 위한 대책을 빈틈없이 추진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인엽 기자 yyy@kihoilbo.co.kr

사진=<기호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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