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팔미도는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3.5㎞ 떨어진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작은 섬이다. 그 이름은 모래톱으로 연결돼 있는 두 개의 섬이 마치 한자 ‘八(팔)’자의 모양을 하고 있어 생긴 것이라고 한다.

작은 섬이어서인지 조선 전기까지의 인문지리 자료에는 보이지 않고,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지도 ‘청구도’에 ‘八未(팔미)’로, ‘대동여지도’에는 ‘八山(팔산)’으로 표시돼 있는 정도다. 이를 보면 한자로는 어떻게 쓰든 그 모양이 ‘八’자를 닮아서 생긴 것은 맞는 듯하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던 해상 경승지였다.

‘인천만’은 서해 중부에 위치한 바다로 한반도에서 해상 활동이 가장 완성하게 이뤄진 곳이었다. 신라시대 당항성이 중국과의 주요한 교역 창구 역할을 했고,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배가 인천의 영종도를 거쳐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로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바다였다.

조선시대 역시 왕도인 한양과 한강으로 연결돼 있기에 왜구의 침략에 대처하는 요충지로서 뿐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漕運船)이 빈번하게 출입해 한국 역사 전 시기에 걸쳐 인천만은 왕성한 해양활동이 이뤄진 바다였다.

육지에 길이 있듯이 바다에도 항로가 있어 주어진 경로를 따라 항해한다. 인천만은 해안선이 복잡하고 바다에는 퇴적물이 쌓여 있어 규모가 큰 배들은 수심이 얕은 이곳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특히 제국의 함선들과 같은 큰 배들이 인천만을 드나들 수 있는 항로로는 풍도와 팔미도로 연결되는 해역이었고, 이로부터 월미도로 이어졌으며 소월미도와 물치도는 그들 함선의 정박지였다.

이 해역은 수심이 깊기에 19세기 서양의 이양선(異樣船)들이 조선을 침략할 때 이용한 제국의 침략 통로였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요호사건 당시에도 이 루트를 따라 인천만에 진입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된 해전이 풍도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고,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소월미도 부근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대가 인천만 탈출을 위해 일본 함대가 대기 중인 팔미도에서 해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인천만은 조선의 해군이 아니라 제국의 해군이 장악했고, 그들만의 해전이 펼쳐졌으며, 조선을 침략한 제국 해군들의 무덤이었다. 

또한 이 해역은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제국 상인의 통로였다. 하지만 일본과 서구 열강은 우리나라 연안에 등대 설비가 없어 자국 함선의 운항이 어렵게 되고 상선의 해난사고가 빈번해짐에 따라 주요 항로와 항만의 수로측량을 실시하는 한편, 등대 건설을 강요했다.

서양식 등대 설치는 조선에 진출한 외국 선박의 보호를 위한 사실상 강압적 조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인천항 관세수입의 일부를 건설비로 충당하기로 하고 1902년 5월부터 등대 건설에 착수했다.

한국 최초의 등대는 이렇게 탄생했고, 1903년 6월 1일 드디어 닮은 모양의 팔미도와 소월미도등대가 점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월미도등대는 해방 바로 직후인 8월 27일 일본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폭파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50년 9월 15일 이른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됐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인민군 수중에 있던 팔미도등대를 탈환·점등해야만 했다.

팔미도는 상륙작전에 나설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유엔군 함정이 통과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이었고, 인천지역은 조수(潮水), 수로(水路), 암초 등 해안조건이 상륙작전에 많은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등대의 안내 없이 야간 상륙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또 반세기가 흘러 2003년 12월 팔미도등대는 현대적 조형미를 갖춘 100주년 기념 상징 조형물인 ‘천년의 빛’으로 교체되면서 그간 100년의 풍파를 견뎌 내며 해상 안전에 한몫했던 임무를 새 등대에 맡기고 영구보존됐다. 

그리고 2009년 팔미도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그 오랜 세월 인천의 수문장 역할을 마치고 평화 기원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팔미도를 돌아들던 옛 범선의 자취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팔미도의 무한 변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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