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존중(尊重)이란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이다. 이는 특히 지도자에게 필요한 소중한 덕목 중 하나다. 존중에 관한 교훈과 가르침은 수많은 인류의 경전에서 전해져 온다. 예컨대 영원한 인류의 고전이자 자산인 「논어」는 ‘위정’편에서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모든 별이 그를 받들어 따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을 얻고 싶으면 복종을 강요할 게 아니라 존중함으로써 자발성을 이끌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특히 청소년의 지도자인 교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교사는 과거처럼 권위적으로 학생들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면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그 억압이 불공정하고 불의하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성향은 최근 학교교육을 통해 성장한 20~30대의 MZ세대에게 돋보인다. 그러나 교사가 스스로를 낮추고 학생들을 높여 주면 그들도 상응하는 마음으로 필히 응대한다. 교육은 인간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엔 교과서의 지식처럼 나열이 아니라 삶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것이 학습을 통해 학생들의 내면을 채우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교사의 내면부터 바로 세워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존중하는 자세가 학교교육의 일상에서 교사의 생각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즉, 학생을 존중하는 것이 내면에서부터 체질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타산이나 가식으로 흐를 수 있다. 혹은 가식이 아닐지라도 교사의 기분이나 감정 혹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다. 그래서 교사를 일컬어 감정노동자라고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에서는 학생들의 마음을 얻기는커녕 마음을 등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돌이켜보아 필자 또한 감정노동으로 치닫던 한때의 순간들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십대 학생들의 특성인 일상에서의 일탈행위를 무시하거나 때로는 등한시 하면서 발생하던 인과응보였다. 학생들은 관심을 받거나 사랑을 원한다. 따라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일탈행위에 의지한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학생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열쇠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들은 마치 ‘누가 누가 더 나쁜가’ 경쟁하는 식으로 일탈 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내면에는 일종의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를 바로잡는 비결은 멀리 있지 않다. 그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어떠한 일탈행위도 머뭇거리게 하고, 결국 선으로 보답하는 선순환을 일으킨다. 그래서 학생들에겐 콩나물 물 주듯이 무한 사랑이 필요하다. 

최근의 일이다. 졸업식 후에 한 학생이 얼굴이 상기된 채 필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감사합니다, 선생님. 면학실에서 공부할 때마다 선생님은 조용히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토닥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반복되는 선생님의 행동이 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늘 저희를 격려하고 존중해 주시는구나 생각하고 저도 나중에 똑같은 방식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라고 뜻밖의 고백을 했다. 이것은 일상에서의 작은 행동의 결과였다. 스스로도 놀란 필자는 교사가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는 학생에 대한 믿음과 존중하는 자세는 그 어느 것보다 교육적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됐다. 이는 청출어람을 지향하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며 변함없이 실천하는 학생에 대한 믿음과 존중의 습관이 가져온 결과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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