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섬마을선생님연구회 운영위원
이영태 섬마을선생님연구회 운영위원

‘정(情)’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어휘다. 사전에 따르면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정의돼 있다. 

하지만 일반인 사이에서 통용되는 ‘정’의 개념은 단어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정은 어머니의 모정, 친구 사이의 우정, 연인끼리의 연정 등 한국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끈이다. 이른바 ‘정’은 ‘관계 맺기’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관계 맺기에 동원되는 형용사의 경우를 보더라도 ‘가는 정’, ‘오는 정’, ‘고운 정’, ‘미운 정’, ‘두터운 정’, ‘애틋한 정’ 등처럼 다양한 수사가 ‘정’이라는 단어와 결합되기도 한다. 

정을 매개로 한 한국 문화는 여타 경우에 비해 우리(we-ness)라는 관념이 강하다. 한국인에게 ‘우리’는 하나됨(oneness), 일치성(sameness)을 가리킨다. ‘우리 아빠’, ‘우리 딸’, ‘우리 아내’와 같은 사적인 영역부터 ‘우리 학교’, ‘우리 선배’, ‘우리 회사’ 등의 사회적 영역,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공적인 영역까지 ‘우리’라는 수사가 등장한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 편끼리’를 지칭하기에 ‘우리’는 동시에 타 집단에 대한(against) 배타성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 편 아니면 남의 편이 될 정도로 양자 사이에 중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편끼리 서로 잘해 주고 아껴 주는 ‘고운 정’과 때로는 싸우면서 형성된 ‘미운 정’이 결합돼 나타나기도 한다. 

"떠나 갑니다. 나를 두고 갑니다. 미운 정 고운 정을 남기고 떠납니다. 돌아올 기약 없는 연락선 뱃머리는 멀어지는데, 내 마음 구름이 되어 당신을 따라갑니다. 당신은 이 가슴에 미운 정 고운 정 남겨 놓았네. 노을진 바닷가에서 당신을 불러 봅니다." (나미 ‘미운 정 고운 정’, 1979)

연인이 기약없는 이별을 하는 상황이다. 이별 이전 연인 사이에는 ‘고운 정’이 관계 맺기를 매개하고 있었다. 연인들은 단어 그대로 ‘우리 편끼리’이기에 상대에게 잘못이 있어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인내를 해야 했다. ‘우리’이기에 상대의 무리한 부탁이라도 정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로 묶였기에 불이익을 받아도 참으면서 뒤끝 없는 사람이 돼야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감내 지수가 있는 만큼 ‘거절’ ‘불이익’ ‘뒤끝’ 등이 횟수가 늘어나면서 또 다른 ‘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른바 ‘미운 정’이 축적돼 ‘남’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은 ‘남’이되 ‘내 마음 구름이 되어 당신을 따라’가는 심사는 어떠한 심리기제로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정’의 뜻풀이가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라 할 때, 그것에 ‘미운 정’을 기대 이해하려 하면 의미가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문학인 르 클레지오(Jean-Marie Gustave Le Clezio, 1940~)는 한국의 ‘정’으로 평가하며, "정이란 개념이 참 오묘하고 독특하다. 영어, 불어 사전을 뒤져 봐도 번역할 길이 없다"라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정’의 대상이 동물이나 사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려동물과 떨어져야 할 때 느끼는 서운함이나 책장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들과 재활용 봉지에 넣어 뒀던 옷가지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놈의 정 때문’이다. 

동물이나 사물과 관련해 정을 운운하는 것을 보더라도 정은 일방적으로 주는 마음이다. ‘정을 받다’이기보다 ‘정을 쌓다’, ‘정을 주다’, ‘정을 나누다’로 표현하는 것도 정이 지닌 ‘주는 특성’을 말해 준다. 

그러나 정을 매개로 한 ‘우리’가 타 집단에 대한 배타성 때문에 정으로 묶인 자들은 간혹 곤란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우리’이기에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고, ‘우리’이기에 먼저 챙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일 때는 별문제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철저히 ‘남’으로 취급받을 수 있기에 그렇다. 

특히 ‘우리’라는 공동체가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소수 폐쇄집단 내에서 운영될 때 그 폐해가 크기 마련이다. 부정부패 관련 사건은 ‘우리’의 부정적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조용필도 이에 대한 대답을 구한 적 있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온 살아온 내 가슴에(정, 1993)"라고 노래한다. 

한국인은 정 때문에 살고, 정 때문에 죽는 오묘하고 신비한 민족이기에 세계인들이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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