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원장
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원장

오래전 은행에서 근무할 당시 ‘필라델피아 내셔널 뱅크’ 국제부로 파견근무를 떠났다. 더하여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Wharton School)에서 공부할 기회까지 얻었다. 첫날 첫 시간 교수의 개강 멘트는 지금껏 뇌리에 생생하다. "여러분! 명품 정신이란 지혜로운 판단(점·點)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선·線), 인내하고 숙성시켜 가는 정신자세(면·面)입니다." 매사 생각하고 실천하며 철학으로 정신세계를 구축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한동안 금융연수원에서 마케팅 전략을 강의하며 이 점→선→면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곤 했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은 점, 선, 면만을 이용한 이른바 ‘차가운 추상’의 거장이라고 불린다. 수직, 수평, 원색, 무채색만으로 표현되는 그의 작품을 두고 본질과 진리, 근원을 밝혀 보려는 화가라고 평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단순화시키면 점과 선, 면으로 이뤄짐을 알 수 있고,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라는 메시지로 이해된다. 

지난 8일 대한민국 ESG경영포럼에서 나온 말들을 살펴보자. "경쟁력 제고를 정책목표로 해야 한다", "회사구성원과의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다", "기업생태계 경쟁력을 지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리고 금융권에서는 "ESG 신경 안 쓰면 자금 조달도 어려워진다",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잡은 ESG 공시원칙에 주목해야 한다", "자금 조달 어려운 중소기업 위해 친환경 제품 개발 선투자" 등의 금과옥조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현장과 현실성에 기반한 워딩이자 레토릭으로, 특히 금융사 어느 대표의 "기업들이 펴내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보면 지나치게 목표지향적이고 과장된 내용이 많다"는 말에 주목하게 됐다. 시작점에서의 방향성을 보다 분명하게 좌표로 삼아 ESG를 이해하자는 의미다. 

목표 달성이란 결과가 모든 과정의 최종 결실이지만 그 과정에 대해 10년 앞을 내다보고 긍정의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되는 철학을 심어야 한다. 중소기업 CEO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의 CEO들은 우린 현장에서 이미 다 하고 있고, 책임지며, 또 앞으로도 현실을 직시하고 잘 해 나갈 것이다. 

이들은 "환경 관련 분야별 목표를 수립하고 실행하며 폐기물, 에너지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공정거래, 취업규칙 정하기, 근로계약 준수, 산업재해 예방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윤리경영과 정보공개, 지속가능을 위한 여러 인증 보유 등 이미 다 잘하고 있는데 현장과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ESG 운운한다고 언급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회적 역학과 구조, 합의, 문명사적 이야기로까지 확대해서 생각해 볼 문제다. 자동차업계 경영진에서 ‘협력업체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동차회사의 탄소중립은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ESG에 대한 접근 전략을 단순하게 기능적으로만 고찰해서는 안 된다는 단적인 표현이다. 

수출업체의 경우 ‘모건 스탠리’가 제시하는 ESG 평가기준이 공정하게 국내 기업에도 적용될른지 등 결국 산업생태계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을 염두에 두고 ESG를 바라보며 실천의지를 키워야 한다. ESG가 억지로 풀어야 할 과제나 숙제가 아니고 새로운 성장 동력이라고 보면 현장, 현실은 당연하고도 충분히 안고 가야 할 기본자산임에 틀림없다. 다만, 너무 현장·현실에 주목도를 높이다 보면 장기적·미래지향적 관점에서 균형감각을 상실할 리스크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현장과 현실이 루틴으로만 해석되고 정체가 안정적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제자리걸음만 한다면 ESG의 출발점은 맞지가 않다. 사회변화, 거래구조와 역학에 대한 철학 부재 의식을 드러낼 뿐이다. 

‘현장·현실을 모르면서’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루틴이고 정체이며 답보이다. 왜? 사회는 이미 ‘뛰어넘는 시대(Beyond:ESG2.0)’로 표현되며 ‘경험’과 ‘시야’가 ‘데이터’와 ‘메타버스’로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철학이라는 수천 년 된 개념을 ESG 활성화로 이어갈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나 규범이 현장·현실이란 이름으로 포장돼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세상이다.

기업 경영에서 인재, 자본, 기술을 다 가졌다고 해서 성장의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통찰과 인내로 다시 한번 업(業)의 기본을, 본질을 생각해야 할 때다. 그 생각의 핵심이 바로 명품 정신이다. 올바른 생각과 제대로 된 행동으로 기본과 본질을 찾아가는 철학적 명품 정신이 바로 기업가정신이며 담대한 ESG 수용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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