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산297 일원 덕정산 동쪽의 해발 84m 능선상에 허유전(許有全, 1243∼1323)의 묘가 자리한다. 고려 후기 문인으로 강직한 성품과 왕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진 허유전은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초명(初名)은 허안(許安)이며 김해 사람으로, 원종(元宗) 말에 과거에 급제해 충렬왕(忠烈王) 때 감찰시사(監察侍史)가 됐다. 

한때 왕이 총애하는 자의 참소를 믿고 그를 순마소(巡馬所)에 가둔 후 장차 벌을 내리려고 했는데, 감히 구해 줄 사람이 없었다. 당시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는 왕의 총애를 받아 왕의 침실까지 출입하고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기를, "감찰(監察)은 왕의 이목(耳目)이 돼 백관(百官)들을 살피고 탄핵하는 자리입니다. 지금 소인배의 참소 때문에 그를 탄핵한다면 사람들이 주상을 어떤 군주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간곡하게 납득시켰으므로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여러 번 전임(轉任)해 충숙왕(忠肅王) 초에 가락군(駕洛君)으로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를 역임했다. 이후 일흔아홉의 나이에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의 충성심과 성정(性情)을 짐작게 하는 일화가 있다.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유배 가게 됐을 때 허유전이 민지(閔漬) 등과 함께 원(元)으로 가서 왕의 소환을 청하려고 했다. 이때 허유전의 나이가 81살이었고, 그의 아내도 늙고 병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만류했으나 허유전은 "사람은 모두 한 번은 죽는 법인데 어찌 아내가 병들고 내가 늙었다고 해서 우리 임금님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편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아들인 허영(許榮)에게 병구완을 부탁하고 마지막 작별을 하고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으나 9일 뒤에 아내는 죽음을 맞았다. 허유전은 원에 도착해 반년 동안 머물렀으나 심왕(瀋王) 일당이 저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충숙왕 10년(1323)에 서거해 현재의 묘에 안장됐다.

1988년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서 주관했던 ‘가락 허시중공 무덤 발굴조사 보고’에는 그의 후손들이 잃어버렸던 선조의 묘를 찾았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옛 기록에 강화 ‘불곡(佛谷, 일명 탑골)’에 소재하는 것으로 돼 있는 허유전의 묘를 찾기 위한 김해허씨 문중 후손의 노력과 간절함은 후손의 출생지인 ‘홍천 불당골’에서 서쪽으로 곧바로 가면 또 다른 ‘불당골’이 있다는 현몽(現夢)으로 이어졌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는 강화도 불은면 두운리 ‘불당골(불곡)’을 찾아내 묘역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왜 강화에 무덤을 쓰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허유전이 모함에 의해 곤란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 준 순마지유 고종수와의 관계에서 보면 강화가 고종수(제주고씨)와 인연이 깊고(제주고씨 사당인 영묘사가 있다) 지금도 제주고씨의 후손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이곳에 안치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허유전의 묘역은 두산재(斗山齋)라고 하는 사당 바로 뒤에 사각봉분 형태로 있다. 사당 입구와 사당 안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고, 두산재를 들어가 오른쪽으로 가면 맞배지붕 형태의 신도문을 지나 그 안쪽에 묘역이 있다. 1988년 발굴조사가 이뤄져 묘역시설과 매장 주체부가 확인된 바 있는데, 그의 석곽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됐다가 1985년 후손인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묘지 발굴 당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점, 얇은 청동 조각 여러 점, 나무관에 사용한 쇠못 한 점, 11∼12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으며 유골의 일부도 출토됐다. 이 외에도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굴조사 이후 봉분을 중심으로 후면에는 반달형으로 두둑을 쌓은 대형 사성(莎城)이 조성되고 묘역 초입부에 상석, 혼유석, 석양과 문인석 등이 배치된 상태다.

그동안 기록으로만 남은 선조(先祖)의 흔적을 찾아 가문의 근원을 밝히려는 끈질긴 노력이 이어져 오늘날 700여 년 전 고려시대 복원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또 한번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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