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엊그제 학교에 부임한 것 같은데 이번 여름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정년퇴직을 한다.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내 일이 되니 총알처럼 빠른 것이 시간이 아닌가 싶다. 정년이 다가오면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연구실을 비워주는 일이다.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책의 일부를 떠나보내야 하니 그 이별이 쉽지 않은 듯 한여름의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먼저, 버려할 책과 후학들에게 줄 책, 그리고 남겨둬야 할 책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책은 남에게 넘겨주려는 박스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먼지 낀 책장을 넘겨보게 된다. 그러한 책 중 하나가 얼마 전 타계한 피터 브룩(Peter Brook 1925-2022. 영국출생 연출가)과 관련된 책이다. 드라마를 전공하지 않은 나는 그의 책을 책상 가까이에 꽂아 놓지 않았지만, 며칠 전 그의 타계소식을 접하고 나니,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을 쫓아가 보고 싶었다.

 피터 브룩은 영국 출신으로 20세기 세계 연극의 표상으로 불리던 연출가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파격적으로 연출해 주목을 받았다. 브룩은 1960년대에 영국 로열셰익스피어 컴퍼니(RSC)의 전신인 셰익스피어 극단 연출가를 포함해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예술 감독도 했다. 그는 ‘리어왕(1962)’, ‘한여름 밤의 꿈(1971)’을 혁신적으로 연출해 연극사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 됐다. 그가 연출한 ‘한여름 밤의 꿈’이 무대에 올려 졌을 때 뉴욕타임스(NYT)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연출가가 만든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작품"이라며 "만일 브룩이 이 작품 말고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해도 그는 연극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브룩은 영국을 떠나 1974년 이래 프랑스에 머물면서도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르몽드를 비롯한 프랑스 언론들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연출가"라고 아쉬워했고,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90세 인간 지진(human earthquake)"이 타계했다고 전했다. 칭찬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표현은 그가 얼마나 혁신적인 인물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브룩의 타계 소식은 나의 지난날을 잠시 소환했다. 십여 년 전 즈음,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의 방송연기학과 이원기 교수가 연출했던 ‘한여름 밤의 꿈’을 떠올리게 했다. 이 교수는 요정들이 나오는 숲을 무대에 간단하게 설치하고, 요정들이 UFO를 타고 무대에 등장하게 연출했다. 필자는 피터 브룩의 ‘한여름 밤의 꿈’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교수의 연출이 실험적인 피터 브룩 스타일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연출을 좋게 봐 준다며 이런 저런 연극 얘기로 밤늦게까지 함께 했던 일이 스쳐간다. 또 하나는 지난해 연극배우 이순재가 리어왕 역할을 한 ‘리어왕’을 보러가야지 했다가 매진 소식에 발길을 접었던 일도 떠오른다. 

 셰익스피어 연극이 400년을 훨씬 넘긴 지금까지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은 그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리어왕은 딸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모두 물려주고, 딸들 집을 교대로 오가며 노후를 즐기려 했지만,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음을 우리의 주변에서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 리어가 딸들에게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해보라고 하면서, 그것을 기준으로 영토를 나눠주겠다고 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 판단으로 보인다. 부녀지간의 인륜 문제를 효도경연대회를 열어 결정하려는 그의 태도는 꼭 나이와 관련짓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야밤에 딸들에게 버림받아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리어는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면서 현실을 직시한다. 글로스터 백작이 두 눈을 뽑히고 나서 진실을 보았듯이,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리어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일까?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크게 변한지 않은 듯싶다. 남에게 주려던 책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날카로운 눈빛을 다시 만났다. 피터 브룩의 책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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