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구식 군대의 쿠데타가 시작됐다. 이른바 임오군란이다. 표면적으로는 신식 군인(별기군)에 대한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해 일어난 사건이지만 집권세력에 대항한 반일운동이었고, 개화세력과 위정척사(衛正斤邪) 세력 간 충돌이었다. 무장한 군인들은 포도청, 의금부, 민씨 세도가, 악덕 시전상가, 별기군, 경기감영 등을 습격하고 대원군에게 달려가 정계 복귀를 요청했다. 그리고 개화세력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일본공사관을 포위·습격했다.

 일본공사인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공사관 직원은 스스로 공사관 건물과 기밀문서를 불태우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24일 새벽 양화진에 도착한 일본공사 일행은 오전 10시 부평에 이르렀고, 오후 3시 인천부 관아에 도착했다. 전후 사정을 몰랐던 인천부사 정지용은 공사 일행과는 면식이 있는 사이여서 의복과 음식을 제공하고 정청(政廳)을 공사 등의 휴게소로 제공하는 한편, 따로 문밖의 관사 하나를 비워 순사 이하의 휴게소로 쓰게 했다. 오후 5시께 이들을 추격하던 군란 주동자들과 인천부 병사들에게 공격을 받아 공사 일행 중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대 혈전을 벌인 끝에 제물포로 나아간 후 월미도로 피신했다. 그리고 26일 오후 영국 측량선인 플라잉피시호에 구조돼 29일 밤 일본 나가사키항에 돌아가게 됐던 것이다. 

 하나부사 일행이 인천부를 탈출할 당시 무장 군인들은 "일본군을 도와 도망치게 한 것은 인천부사의 소행"이라고 외치며 부사를 살해하려 했으나 간신히 화를 피했다고 한다. 

 인천부사 정지용(鄭志鎔)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는 1880년 3월 24일부터 1882년 6월 22일까지 약 27개월간 인천부사로 재직했다. 그가 인천부사로 재직 당시는 인천이 개항 바로 전으로 인천을 드나드는 외국 선박은 많았고, 비록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전이었지만 1881년 3월부터는 청나라와 미국 등 외국 사신들의 접대를 인천부 관사에서 하도록 지시받고 있었다. 1882년의 인천은 대내외적으로 가장 바빴던 시기였다.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6월 6일 조영수호통상조약, 6월 30일 조독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할 때마다 인천부사로서 그의 역할도 상당했을 것이며, 한편으로 약소국 관리로서의 회한도 컸으리라 보인다. 

 1882년 8월 4일 플라잉피시호가 군란 수습을 위해 다시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그러자 다음 날인 8월 5일 대원군(8월 26일 청에 납치)은 그를 오늘날 서울시 부시장 격인 한성부 좌윤으로 제수했다. 그러나 같은 날 올라온 정지용의 장계를 보면 "지금 일본과 화통하고 있지만 나라는 지탱하기 어렵고, 저들은 우리나라의 허실과 형편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호조약을 맺으려는 속셈은 전적으로 피 흘리는 전쟁을 하지 않고 남의 나라를 빼앗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이 지역을 지킨 3년간 힘든 부담이 더없이 심하였는데, 군사는 400명도 차지 않는데다가 예리한 무기나 전곡(錢穀)도 없습니다"라 해 그간의 개화정책에 대한 우려와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가 자결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유감을 표시하며 고향으로 잘 운구할 것을 지시했다. 후일 인천의 일본인 유지들은 하나부사 공사 일행의 ‘조난기념비’와 부사 정지용의 비를 인천도호부 관아 앞에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화방공사일행조난비’만 옮겨져 남아 있다. 

 인천 개항 전 ‘인천부사’로서 외세를 최일선에서 체험했던 그가 왜 자결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하나부사 일행에게 편의를 제공한 것이 흠이 될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왜 한성부 좌윤으로 승진 보직한 것인지, 인천부에서 월미도로 도피할 당시 많은 일본인 사상자가 났음에도 일본인들은 왜 그의 기념비까지 세운 것인지, 자료의 한계에 있는 우리로서는 가치의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 그의 ‘자결’이 시대의 경종을 울리는 우국충정의 발로였다면 그에 대한 기왕의 평가는 해석을 달리 해야 할 것으로 본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