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호족(豪族)에 의해 성립된 고려는 신라가 왕족 중심의 정치를 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이성귀족(異姓貴族)들에 의한 정치를 했다. 이성귀족들은 원래 호족이던 때의 출신지를 본관(本貫)으로 칭했고, 본관은 그들 세력의 상징이 됐다. 따라서 고려는 가문(家門)이 중요시 되는 문벌귀족사회(門閥貴族社會)로 특징지어진다. 

문벌귀족의 경우 고려 전기와 후기 시대 변화에 따른 가문의 차이가 있었지만 인주(경원) 이씨 가문은 전·후기에 걸쳐 모두 문벌귀족 가문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고려사」 충선왕 즉위 교서에 "신라 왕손 김휘(金暉)의 일문은 역시 순경(順敬) 태후의 숙부 백부 되는 가문이다. 언양 김씨 일문과 정안 임 태후의 일족 그리고 경원(慶源) 이 태후, 안산 김 태후, 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 허씨, 평강 채씨, 청주 이씨, 당성 홍씨, 황려 민씨, 횡천 조씨, 파평 윤씨, 평양 조씨 등은 모두 누대 공신, 재상의 친척으로서 대대로 혼인할 만하다"고 해 고려 후기에 활동하는 ‘재상지종(宰相之宗)’ 15가문에 포함돼 있다.  

이들은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혼인정책을 활용했는데,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차지하는 명문세족(名門世族)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존재로서 대표적인 가문 중 하나가 인천을 본관으로 하는 인주 이씨(仁州李氏)였다. 

인주 이씨가 본격적으로 외척으로 활동하는 것은 이허겸(李許謙)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 때이다. 이자연의 세 딸이 모두 문종비가 되면서 이자연이 외척으로 등장하게 됐는데, 그의 장녀인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가 순종·선종·숙종 세 왕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 등을 낳았다. 이어 문종의 손자인 예종대에는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李資謙)의 딸이 왕비(文敬太后)로 책봉돼 인종과 2명의 딸을 낳았다. 인종 역시 이자겸의 두 딸과 중첩적으로 혼인해 7대 80년간 누대에 걸쳐 문벌가문으로 자리함으로써 인천이 ‘왕실의 고향’이라는 의미에서 ‘7대어향(七代御鄕)’이라 기록됐던 것이다. 

문종 비 인예순덕태후(?∼1092)는 이자연의 딸로 문종의 또 다른 비인 인경현비(仁敬賢妃)와 인절현비(仁節賢妃)의 언니가 된다. 문종 6년(1052)에 왕비로 책봉됐고, 선종 3년(1086) 왕태후가 됐다. 불교를 신봉해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했고(1089), 은으로 유가현양론(瑜伽顯揚論)을 쓰는 것과 금탑 만드는 것을 발원해 숙종 때 완성했는데, 금탑은 숙종 10년(1105) 국청사에 안치됐다. 문종과의 사이에서 순종·선종·숙종과 대각국사 의천 등 13왕자 6공주를 낳았다. 1092년 서경(西京, 평양) 대릉(戴陵)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인예인데, 인종 18년(1140)에 성선(聖善), 고종 40년(1253)에 효목(孝穆)이라는 시호가 더해졌다.

예종 비 문경태후(?∼1118)는 이자겸의 둘째 딸이다. 예종 4년(1109)에 사저에서 인종을 낳았다. 1114년 왕비로 책봉됐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총명해 왕의 총애가 극진했다. 인종과 두 궁주(宮主)를 낳고 예종 13년(1118)에 죽었다. 태후가 병석에 눕자 예종이 친히 약을 조제했으며, 태후가 죽으니 여러 차례 통곡했다고 기록에 전한다. 장례 때는 친히 신봉문(神鳳門) 밖까지 나가 제사를 지낼 정도로 태후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시호는 순덕(順德)왕후라고 했고 수릉(綏陵)에 안장했다. 아들인 인종이 즉위한 후 문경왕태후로 추존됐고, 인종 18년(1140) 자정(慈靖)으로 거듭 추증됐다.

인주 이씨는 이자의·이자겸의 난과 무신란을 거치면서 그 부침(浮沈)이 일정하지 않지만, 상당수는 그들의 족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 귀족사회에서 인주 이씨는 최고의 문벌귀족으로서 10여 대에 걸쳐 5명의 수상(首相)과 20명에 가까운 재상(宰相)을 배출했다. 이러한 고려시대 인주 이씨 사례를 통해 인천이 ‘왕도(王都)의 공간’이자 ‘역사고도(歷史古都)’였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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