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동국대 명예교수

나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의 레기스탄 광장 근처인 어떤 사로이 호텔에 묵는 중이다. 낮에는 50℃ 가까운 체감온도가 두려워 그늘에 몸을 숨기는 그들처럼 파미르를 일주하느라 이미 발등이 시커메진 나는 집안에 숨어 불타는 해를 배웅하며 글을 쓰는 중이다. 그 옛날의 혜초나 마르코 폴로처럼.

 중앙아시아 사막에는 극동의 한반도에서 극서의 이란, 터키까지 이어지는 소위 Ggeat Silk road, 즉 거대한 실크로드가 있다. 그 1만㎞ 가까운 길고도 긴 길은 대부분은 텅 빈 사막이나 반사막으로 이뤄졌고, 중간 중간의 몇백㎞마다 조금 큰 오아시스 둘레에 큰 마을과 도시들이 점처럼 박혀 있다. 주민들을 겨우 먹여살릴 만한 좁은 농토,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이 모여 놀 만한 작은 숲이 있다. 

 그러다 보니 수백 마리의 낙타 등에 실크 같은 귀한 물건을 싣고 다니는 대상들이 묵는 훗날 ‘사라이’, ‘참’ 등으로 불리는 여관들이 생겨났다. 주인들은 대상들을 도둑떼에게서 지키고 통행세를 받기 위해 군사를 양성하면서 오아시스 둘레를 흙벽돌로 쌓아 성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도시가 만들어졌고, 여러 도시들을 엮은 ‘도시국가’들이 기원전 7세기쯤부터 중앙아시아의 역사에 등장했다. 이렇게 소구디아, 즉 소구드인들의 지역이 생겼고, 대표적인 도시가 사마르칸트다. 고구려가 큰 나라로서 전성기를 누릴 때 사마르칸트는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으로 불렸고, 중국에 거주하는 그들은 강씨가 됐다. 더 서쪽의 도시국가인 안국(부하라) 출신은 안씨였는데, 잘 알려진 사람이 안록산이다. 

 그런데 뜨거운 열기로 타들어 가는 이 지역은 한없이 멀고 사람도, 문화도 우리와는 많이 달라서 전혀 연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우리는 조선시대와 달리 고대에는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활동을 했고, 유라시아라는 드넓은 세계와 여러 가지로 연결됐다. 심지어는 이 지역과 언어나 혈연마저도 연관이 있다. 다만, 이러한 사실들을 서로가 오랫동안 망각한 것이다.

 1970년대 사마르칸트의 구도시 지역인 아프라시아압 궁전터에서 7세기 중반께인 바르후만왕의 무덤 벽화가 발견됐다. 뛰어난 예술성과 함께 내용들은 사마르칸트의 역사·문화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 재편과 복잡한 외교관계의 실상을 알려 줬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을 알현하는 여러 나라 사신단들의 끝에는 2명이 깃털 꽂힌 조우관을 쓰고 단정하며 활동적인 옷차림, 고리자루긴칼을 차고 두 손을 마주 낀 채로 늠름하고 당당한 눈길로 서 있었다. 고구려 사신들이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특히 오랫동안 소위 반도사관, 중화주의에 젖어 온 역사학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거나 왠지 자신없는 태도를 갖는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현재 중국 신장성의 위구르 지역과 이어진 실크로드는 기원전 5세기부터 활성화됐다. 페르시아계 상인들은 동쪽으로 오면서 물류망을 완성시켰다. 실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대전쟁들은 물류망 확보를 놓고 벌어진 것이다.

 6세기에 이 도시국가들은 대상들과 예술단들을 중국의 북위에 파견했다. 그 일부는 요서지역에 살았으니 고구려에도 온 듯하다. 뒤를 이어서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더더욱 많은 소구드인들이 왔고, 고구려나 신라의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중국 역사책들을 보면 소구드와 고구려는 예술과 문화를 많이 교류한 듯하다. 특히 벽화에 그려진 악기들, 유명한 춤들, 서커스 등이 분명하다. 서남쪽의 티베트, 북쪽의 돌궐, 그리고 아랍지역을 통일한 압바스왕조들이 연합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와 중국 세력은 운명을 건 대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역사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Great Game의 여파로 백제, 신라, 왜국, 말갈, 거란, 돌궐, 철륵, 현재 투르판의 고창국, 심지어는 사할린이나 캄차카반도의 종족들도 이 국제대전의 큰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고구려로서는 다양한 전쟁정책을 취했고, 왜국 등과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외교를 전방위로 추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국 포위전선의 구축 또는 중국 세력의 배후 압박을 위해 사마르칸트 지역에 사신을 파견했을 가능성은 크다.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이 있다. 고국으로 귀환할 수 없었던 고구려 사신단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곳에 정착한 그들의 역사와 후예들은 어떻게 됐을까? 역사의 많은 사실들은 대부분은 사라지거나 망각된다. 더구나 사마르칸트 같은 오아시스 도시에서는 역사의 파편들이 모래바람에 날려간다. 하지만 큰 것들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을 수 있다. 이 지역의 혈연이 조금 섞여진 고구려의 후예이며 고구려 학자인 나는 긴 시간 동안 모래와 무너진 유적들, 사람들을 보면서 고구려와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다닐 것이다. 사막도시의 어느 곳에 분명히 남아 있다는 믿음을 끌어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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