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고려는 1270년 강도(江都)시대 39년을 마감하고 개경으로 환도(還都)했다. 그리고 이른바 원 간섭기에 접어들었고, 제후국이 된 고려는 원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의 위기를 겪게 됐다. 칭기즈칸이 몽골 대제국을 건설하고 쿠빌라이가 중국을 평정한 후 나라 이름을 원(元)이라고 일컬었다. 

 원은 고려의 동북지역에 쌍성총관부, 서북지역에 동녕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내정에 개입했다. 고려가 원의 속국이 되면서 왕실 용어와 관제 등도 격하됐다. 

 충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국왕의 묘호에 조(祖)나 종(宗) 대신 왕(王)을 붙이도록 했고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바꿨다. 원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6명의 국왕 이름 첫자에 ‘충(忠)’을 붙였다. 관제는 2성 6부에서 1부 4사로 격하됐다. 

 이와 함께 고려는 공녀(貢女)와 금, 은, 인삼, 잣, 매 등 각종 공물을 바치며 인적·물적으로 엄청난 수탈을 당했다.

 무엇보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을 원의 공주와 결혼시킴으로써 고려를 사위의 나라로 삼았다. 

 13세기 후반부터 원나라 황족 출신의 공주들이 고려의 왕비가 됐다. 당시 고려 국왕과 원의 공주 사이에 태어난 왕자는 원나라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아야 했고, 자라서는 원의 공주와 결혼한 뒤 즉위 시기에 맞춰 귀국했다. 원은 이를 간접 지배의 수단으로 삼았다. 

 고려 왕실과 원 황실의 첫 통혼은 제25대 충렬왕이었다. 원종의 맏아들인 충렬왕은 정순왕후 김씨 소생인데 충렬왕을 출산한 직후 승하해 강화 가릉에 안장됐고, 충렬왕이 즉위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됐다(1274). 

 충렬왕은 1267년 태자로 책봉된 이후 원나라에 입조해 당시 39세의 나이로 이미 정화궁주와 혼인해 자녀까지 둔 상태에서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 충선왕 역시 원나라 진왕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했고, 충선왕의 차남 충숙왕은 원 황족 출신인 복국장공주와 결혼했다. 

 충숙왕의 아들 충혜왕의 비 역시 원 황족 출신 덕녕공주로 충목왕을 낳았다. 충숙왕의 차남이자 충혜왕의 동복아우인 공민왕은 원 순종의 손자인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이들 중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와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만이 왕후로 추증 받았다. 

 원나라 공주들은 자신보다 먼저 고려 왕에게 시집 와 있던 고려 여인들을 제치고 왕비가 됐고, 심지어 공주가 아니더라도 몽골인이면 고려인들보다 우선순위가 됐다. 

 고려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기세와 횡포가 대단했으며, 남편인 고려 국왕도 업신여겨 함부로 대했다. 그 중에서도 제국대장공주의 위세가 대단했는데, 충렬왕과 함께 사찰에 행차했을 때 자신을 따르는 시종의 수가 적다거나 충렬왕이 자신보다 앞서 갔다는 구실을 들어 충렬왕을 때리기까지 했다. 

 원나라 공주들의 투기로 인해 가정불화도 끊이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가 둘째 비로 밀려난 후로도 계속 경계하고 질투했다. 결국 정화궁주는 별궁에서 지내다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한 후에야 다시 충렬왕과 함께 살 수 있었다. 반면 마지막 몽골인 왕비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과 금슬이 좋았고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을 지지해 줬다.

 원나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충렬왕대 이후 고려 국왕은 불과 10년 미만에 폐립과 복위가 반복됐다. 충렬·충선·충숙 3왕이 각각 중간에 한 차례씩 폐위됐다가 복위했고, 충혜·충목·충정 3왕은 각각 5년도 채 안 돼 폐위됐다. 

 고려 후기 원 출신 왕비들의 등장은 결국 고려와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 자주권을 잃은 나라의 혼란상을 보여 주는 700여 년 전 역사의 한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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