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늑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상당수를 빼앗기자,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특히 안창호와 양기탁에 의해 주도·발기된 1907년의 신민회(新民會)는 각 애국계몽운동단체들과 연합해 나가면서 전국의 애국계몽운동을 국권회복운동에 직결시켰다. 신민회는 당시 민족 운동가들을 망라한 항일 비밀 결사단체로, 국권 회복과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으며 실력 양성 운동과 민족주의 교육, 그리고 민족 산업을 육성을 도모하며 이후의 모든 애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사실상 지도하고 추진했다.

그들의 활동은 민족 역량을 대폭 증강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는데, 신문화·신문학운동의 한 방법으로 ‘창가(唱歌)’를 널리 활용했다. 창가는 개항과 함께 한국 사회에 수용된 서구의 악곡에 맞추어 제작된 노래로, 찬송가 등 서양식 악곡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신식의 노래’였다. 창가는 ‘독립신문’ 등 당시의 신문 매체나 학회지, 그리고 교회에서 발간하는 잡지 등을 통해 주로 발표됐다. 나아가 학교에서는 창가를 공식 교과로 채택해 가르치게 함으로써 급속도로 확산됐다.

당시 만들어진 창가들은 주로 신문명과 신교육을 예찬하거나 젊은이들에게 신사상과 자주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작품들이었다. 또 조직구성원들에게 조직의 성격과 취지를 알리고 단합심을 고취하려고 단체가를 만들어 불렀다. 그 결과 여러 창가집들이 다투어 간행되고 교가, 독립군가 등으로 확산되면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무하는 노래로 기능했기 때문에 온 국민의 노래로서 전국에서 애창됐다.

그러나 통감부는 이들 애국창가에 대해 불온 창가로 매도하고 급기야 금서 조치했다. 나아가 조선총독 데라우치는 1910년 10월 각도 장관회의에서 사립학교 노래들을 "독립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을 반대하는 불온 창가이자 위험한 노래"로 규정해 철저한 탄압을 지시했다. 국내외의 창가집은 대부분 압수됐고, 창가는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더 이상 부르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을 매개로 하는 항일과 독립운동은 중단됨이 없이 꾸준히 계속됐다. 국내외의 애국적인 노래들은 곧 항일가이자 독립가로 이어졌고, 해외의 한인사회와 민족학교로 번져갔으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또 하와이와 북미지역 그리고 멕시코와 쿠바에서 한인들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국민의식을 심어줬다.

1916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등사본으로 인쇄된 「애국창가」가 간행됐다. 이보다 앞서 1914년 북간도의 광성학교 음악교재로 쓰인 「최신창가집」이 발간됐지만, ‘애국’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노래집으로는 처음이었다. 서문에서도 "국민의 정신을 일깨우는 데에는 노래가 으뜸으로, 우리 청년 애국 동지에게 소개한다"고 해 노래를 통해 국민의 정신 함양을 이루고자 함을 천명했다.

여기에는 악보형태의 60곡과 가사형태의 17곡을 포함해 총 77곡이 실렸는데, 대부분의 곡조는 기존의 찬송가와 외국의 민요 선율을 차용했고, 민족적 감흥을 일으킬 만한 ‘애국’의 가사를 입혀 그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하와이는 미주지역 한인 이민의 시발점이자 미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1902년 12월 자의반 타의반 인천의 제물포에서 이역만리로 떠난 초기 한인 이민들은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흘린 눈물과 피와 땀은 ‘큰 뜻을 담은 군자금’으로 모아졌고, 일제의 조국 침략과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는 조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하와이에서 불렸던 애국 창가는 노래를 통해 민족적 저항과 단결을 이루고자 했던 분명한 동기가 있었다. 나라 사랑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기반으로 항일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출했으며, 자유와 해방을 기원하고 애국심과 독립을 염원했다. 하와이 한인들의 내면에 세대를 이어가며 장기간 항일투쟁을 가능케 한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애국 창가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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