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세계를 울리고 있다. 이전의 ‘오징어게임’이나 영화 ‘기생충’에 이어진 ‘한류’ 신드롬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천재 변호사를 둘러싼 법조드라마가 눈물겹도록 따스해 마냥 빨려들게 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를 통해 무려 전 세계 39개 언어로 번역돼 보급됐다. 나라마다 자국 통용 언어로 번역 자막이 뜰 것이다. 각 언어 담당 번역가들은 어떻게 해야 한국말의 ‘말맛’을 잘 살려 표현할지 나름대로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한국어 자체의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는 없다. 결국 각국 시청자가 한국어를 익혀서 들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때마침 유럽·미주에까지 대학마다 수강자가 몰릴 만큼 한국어는 인기라 한다. 지난해 10월 영국 옥스퍼드사전에는 우리말 발음 그대로 26개의 단어가 새로 실리기도 했다. ‘우영우’ 드라마의 김밥(kimbap)을 비롯해 한류(hallyu), 반찬(banchan), 만화(manhwa), 먹방(mukbang) 등등이다. 

나는 2021년 4월 「우리 시조와 어우러진 한글과 한자의 아름다운 동행」이란 자그마한 책자를 펴냈다. 거기서 왜 ‘한글’(한국어)로 세계인들의 말을 거의 다 적을 수 있는지를 설파했다. 한글은 우주만물의 원리인 천지인사상과 사람의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든 글자이기 때문이다. 1940년도에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훈민정음’은 ‘한글’의 본이름)에 자세히 나와 있다. 훈민정음은 우주의 원리를 적용해 만든 문자인 만큼, 이 우주에서 나는 소리는 무엇이든지 다 적을 수 있는 게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영우’ 드라마는 각본이나 감독,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도 훌륭하지만, 이런 오묘한 원리를 지닌 한국말로 표현됐기에 낯선 외국인들에게 더 각광을 받는지 모른다. 표기문자로서의 한국어, 즉 ‘한글’로 표현되는 어감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한글은 인간 본능에 최적화된 발현 문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이동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해인(海印)시대(인터넷시대)다. 이런 때에 한글이 전 세계로 급속히 번지는 것은 마땅한 귀결이다. 근조선과 일제시대의 억눌려 왔던 내·외부 여건들이 해소되고 나니 물속 음지에 쌓여 있던 ‘한글 연못’의 물꼬가 터진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문화(K-culture)의 핵심 아이콘은 바로 ‘한글’이라 할 수 있다. 바야흐로 한글의 세계화는 확산될 것이며, 머잖아 UN에서 세계 공용어로 지정될지 모른다. 언젠가는 ‘SΛMSUNG’ 대신 ‘삼성’, ‘HYUNDAE’ 대신 ‘현대’가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잡기를 바라 본다.

올해는 한글 반포 576돌이 된다. 반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글이 온전히 사용되기는 해방 후 약 80년 정도밖에 안 된다. 1443년 절대왕정 세종대에 창제됐음에도 나랏글(국문)로 인정받지 못한 채 1894년 갑오개혁 때에야 비로소 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기까지 450여 년이 걸렸다. 그 후에도 36년 동안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줄곧 내·외부의 핍박을 받았다. 심지어 실사구시를 중요시한 실학파 거두 유형원이나 정약용도 한글을 쓰지 않았다. 암클이니 통시글이니 해 천시를 받았다. 아무리 훌륭한 일들도 그 당시 인간사의 사회상규에 맞지 않을 때 멸시나 핍박받은 사례는 수없이 많다. 

오늘날 한글의 자리는 양지에 활짝 핀 꽃떨기처럼 높다랗다. 그럴수록 지난 반천년간의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 책에서 주장했듯이 한자도 우리 조상 동이족이 만든 우리글, 한국어이기에 ‘韓字’(한자)라고 썼다. 한자를 일명 ‘書契’(서글)로, 한글을 한자어 ‘韓契’(한글)로 쓰기도 한다. 한글과 한자는 모두 우리 문자다. 한글은 양글이요 한자는 음글이다. 둘을 함께 쓸 때에 서로 미비점을 보완해 보다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할 수 있다. 한글! 부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이즈음 한자의 궁한 처지를 이해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속 깊이 녹아들 때 바로 한몸이 될 수 있다. 시조로 읊는다.

- 한글의 길 -

 훈민정음 창제된 뒤
 고행 길로 한 오백 년
 
 이제는 꽃수레로
 하늘 길도 오고간다
 
 한자와
 함께 걸을 때
 정녕 앞길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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