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갈등은 주로 원활하지 못한 인간관계 때문에 발생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각자의 가치관이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이 갈등 원인의 전부라고 믿으면 둘 사이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나 자신에서 찾게 되면 관계 복원이 훨씬 수월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대부분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지만, 모든 타인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는 ‘주인’이지만 너는 ‘대상’이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대상인 너는 항상 주인인 내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불화나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갈등이 ‘주관적인 나’와 ‘객관적인 너’라는 기본 인식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에 대해서는 주관적"으로 바라보라고 조언합니다. 너는 ‘대상’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여길 때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는 거지요.

‘대상’이라고 여긴 사람이 왜 ‘주인’처럼 중요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지혜의 소금 창고」(김태광)에 나옵니다.

어느 부자에게 일곱 살 된 늦둥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의 생일날, 또래 아이들이 입지 못하는 멋진 승마복을 선물하고 함께 야외로 나갔습니다. 승마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이 참으로 멋졌습니다. 그런데 저녁부터 아들이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사망 원인이 규명됐는데, 그 승마복에 수를 놓은 가난한 침모 방에서 병균이 묻어 온 것이었습니다. 어둡고 추운 지하방에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침모와 병든 남편이 살았는데, 오한으로 남편 몸이 떨려오자 덮을 이불이 없어 자신이 수놓던 부잣집 아들의 양가죽 승마복을 덮어 준 것이었습니다. 그때 병균이 옮겨온 것이었습니다.

부자는 스스로를 ‘주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침모를 그저 ‘대상’이나 ‘수단’일 뿐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대상’이 ‘주인’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점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제야 부자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주관적’이라는 말은 상대를 ‘주인’으로 여긴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타적인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타적으로 살면 손해 볼 것만 같은데 사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감동 가득 한 뼘 이야기」(최헌)에 노나라에서 높은 벼슬에 있던 맹손의 일화가 나옵니다.

사냥을 나간 맹손은 새끼 사슴 한 마리를 잡아 하인에게 "살아 있는 사슴이 있으면 사냥에 방해가 될 테니 집에 가져다 두게"라고 말했습니다. 하인이 산길을 내려오는데 어미 사슴이 슬피 울며 따라왔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가 새끼를 풀어주고 맙니다.

귀가 후 그 사실을 안 맹손이 화를 내며 그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석 달 후 그를 다시 불러 자기 아들을 보살피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 이유를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를 내치긴 했지만, 그처럼 인정 있고 선한 사람도 드물더라. 사슴 새끼에게까지 깊은 인정을 베푸니 내 아들을 맡긴다면 더 깊은 애정으로 돌볼 게 아닌가."

고대 로마에서는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라는 인사법이 있다고 합니다(「좋은 생각」(2018년 5월호). 여기서 ‘당신’은 나와 관계된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을 보는 부모는 무척 기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큰 성취를 이뤘을 때 내 마음 역시도 그럴 겁니다. 너와 나 사이를 갈등의 늪에서 벗어나 행복한 관계로 만들어 주는 이런 이타적인 태도가 오늘날에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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