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원일 전국대학동문회발전협의회 회장
한원일 전국대학동문회발전협의회 회장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인천은 반짝인다. 항구를 애무하는 바닷물에 떨어진 달빛이 가만히 반사된다. 긴 활주로를 연신 박차고 오르는 국제선 비행기에서 하얀 빛이 떨어진다. 

우리는 인천을 관문의 도시라 한다. 여기서 관문은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할 단계이기도 하기에 관문의 도시 인천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에서 한인 121명이 강제로 일본 여객선을 타고 최초로 이민(?)을 갔다. 현해탄호를 타기도 전에 신체검사에 걸린 19명은 탈락하고, 1903년 1월 13일 이역만리 하와이 호놀룰루에 102명만이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1905년 8월 8일 마지막으로 7천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팔려나가 갖은 고난과 역경의 역사를 쓰며 오늘에 이르렀다. 

인천항에서 우리 품을 떠난 이들의 그림자가 아직 어른거리는데,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750만여 재외동포가 인천을 통해 모국과 거주국을 오가며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심야 트로트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마무리 인사에서 지금까지 시청해 주신 해외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해외 근로자 여러분이라고 한다. 

영어사전에 보면 디아스포라는 바빌론 유폐 후 유대인의 이산(Dispersion)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 뜻은 세계 각지에 산재하면서 정체성과 민족성을 상실하지 않고 세대교체를 반복해 온 공동체를 말하며 유대인이 그 전형적인 예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세계 무대 연결의 첫발인 항구도시 제물포에서 시작됐다.

구한말 일제 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인천항에서 밀려 나간 바닷길 이주의 예는 앞서 언급한 바 있다.

K-노동의 주역으로 편견과 억압 속에서 떠난 이들을, 고향의 댐(Dam) 인천은 과연 떠나 보내기만 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민족적 내공으로 근로자의 한류를 개척한 그들에게 훈장을 달아 주지는 못하더라도, 불가능한 승리를 거둔 이들을 큰 자산으로 우리 품에 안아야 하는 것이다. 

개항장으로서 면모를 일신해 나간 제물포엔 일본과 청국 등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설치 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조계가 만들어지다가 1913년 인천부로 승격했다. 마을 언덕에 교회당이 있었지만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랐던 제물포는 1968년 중구로 들어가고, 1981년 인천은 직할시에서 1995년 다시 광역시로 바뀌었다. 

민선8기 인천시장의 1호 공약 제물포 르네상스는 원도심 재생 혁신을 뜻한다. 땅거죽을 밀고 올라오는 작약 움이 사라진 중구·동구 원도심을 살려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구상은 담대한 시도다. 인천의 중심지 기능을 세상의 속도와 달리 제물포의 공동화를 끝내고 지역 간 형평성을 맞추겠다는 따뜻한 시정의 발현인 것이다. 

내 땅 인천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제물포 르네상스를 통해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지역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비타민과 미네랄도 있는 내항 1부두와 8부두에는 수출 지원을 본격화하고 해외시장 개척단을 보내야 한다. 

인간의 목숨을 걸고 낸 항로는 시대에 맞선 위대한 용기이자 인류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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