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인천항 개항연구소 사무국장
안정헌 인천항 개항연구소 사무국장

올 7월 17~18일 1박 2일 일정으로 대이작도를 다녀왔다.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고려고속페리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배를 타고 가는 시간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 10시께 이작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영화 ‘섬마을선생님’(감독 김기덕, 1967)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지석과 노래비였다. 그리고 해안가 공영주차장을 따라 영화의 주요 내용과 장면들이 소개돼 있었다. 그런데 정작 영화 촬영지였던 ‘계남분교’는 폐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방치돼 관리의 손길을 잊은 지 너무나도 오래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앞에서는 조형물 등을 과할 정도로 설치해 놓고, 정작 중요한 콘텐츠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쉬웠다.

 점심을 먹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이 있다는 ‘둘얼레바위’를 찾아갔다. 이곳은 대이작 작은풀안 해변에서 소이작 쪽으로 망재 남쪽해안에 옛날에 고기가 많아 돌살을 매던 곳으로 돌로 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과거에는 ‘돌어렵’이라고 불렀다가 ‘돌어려’, 그리고 ‘돌(둘)얼레’로 변했다고 한다. 둘얼레에 펼쳐진 갯바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으로, 변성암과 화성암이 섞인 혼성암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암석이 심한 변성을 받으면 옅은 색의 광물이 분리돼 나가 흰색 띠로, 짙은 색의 광물은 남아 검은 띠로 변하게 되는데, 검은 띠를 이룬 암석이 녹은 상태에서 당겨져 끊어진 자리에 옅은 성분이 침투해 사다리꼴 형태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 감히 인간의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간들을 이 섬에서 묵묵히 견뎌 온 모든 것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우리 인간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한 개발과 관광객들의 편의 제공이라는 잣대로 너무 쉽게 과거를 지우고 거기에 불투명한 미래를 계획하지만, 자연은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변하는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

 자연의 변화는 ‘오형제바위’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을 맞으며 의연하게 서 있는 모습을 이은춘 시인은 ‘먼 울음’이라는 제목으로 묘사했다.

 "백중사리 지나/ 달그림자로 어둑해지는 바다/ 물빛이 깊다// 칠산바다 나가 돌아오지 않는/ 조깃배 기다리다 바위로 남았다는/ 이작도 오형제,/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정월이면/ 주먹밥 한 덩이 실은 대성배 띄워/ 사람들은 원혼을 달랬다// 바다는 말이 없고// 나는/ 바위 옆 난간에 기대어 서쪽 먼 울음을 듣는다."

 이작도 선착장 공영주차장을 걷다 보면 바다 갯골 맞은편에 소이작도의 ‘손가락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끝까지 걸어가면 건너편에는 섬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을 듯한 모습으로 ‘오형제바위’가 파도를 맞으며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강자병 이작도 어촌계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전에 조기철이 되면 목포 앞바다(칠산바다)에서 연평도 앞까지 조기를 따라 3개월 이상을 배 위에서 생활하셨다고 한다.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는 옹진군의 섬들 중에는 선상파시로 이름을 날린 곳이 여럿 있다. 굴업도의 민어파시, 대청도의 고래파시, 연평도 조기파시 등이 대표적인 예다. 파시의 흥성거림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말씀을 해 주시는 어촌계장님의 눈에는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필자의 확대해석일까. 파시의 화려함 뒤에는 뱃사람들의 노고는 물론이고 어로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을 만한 또 다른 곳은 봉수대가 있는 부아산(負兒山)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자어의 ‘부아산’보다는 ‘아기 업은 재’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아이를 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지명이다. 필자의 부족함인지 몰라도 이들에 대한 설화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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