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시인
이태희 시인

지난달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이 발간됐다.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13년 만의 일이다. 평소 좋아하는 작가였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서둘러 일독했다. 2001년 출간된 김훈의 출세작 「칼의 노래」 이후 20여 년 만이다. 내심 성웅 이순신이 「칼의 노래」를 통해 인간 이순신으로 재탄생하던 독후감을 떠올리며 영웅 안중근이 「하얼빈」을 통해 어떻게 조명될지 궁금한 마음이었다.

"조준선 끝에서 노루가 쓰러졌다. 노루는 눈 속에서 피를 흘리며 뒹굴었다. 안중근이 총을 들고 일어섰다.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안중근은 다시 서서쏴 자세로 노루를 겨누었다. 노루는 일어서지 못하고 허우적였다. 안중근은 다시 쏘지 않았다. 노루는 옆구리가 관통되어 있었다. 사출구의 살점이 경련을 일으켰다. 노루의 몸통을 헤집고 나온 탄두가 눈 위에 떨어져 있었다. ……총이란, 선명하구나. 안중근은 노루를 짊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한나절이 걸렸다."

작품 초반부의 인상적인 장면이다. 안중근은 체포된 후 일본인 검찰관이 진행한 첫 신문에서 자신의 직업을 ‘포수’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위의 장면은 포수 시절의 안중근이 경험했음 직한 일을 김훈이 상상해 그린 것이다. "총이란, 선명하구나." 이 한 문장이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의 음성을 떠올리게 했다. 김훈은 문체는 「난중일기」의 문체와 겹쳐지고, 다시 안중근의 목소리와 포개졌다.

안중근의 육성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의 목소리는 ㈔안중근평화연구원에서 2014년 간행된 「안중근 신문기록」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신문(訊問)이라는 정황 탓일 수도 있겠지만 단문으로 이어지는 문답의 내용을 통해 안중근의 담담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단답형으로 이어지던 첫 신문기록에서 눈길을 끈 것은 "이토 공작을 왜 원수로 여기는가?"라는 검찰관의 질문에 열다섯 가지에 달하는 살해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그 열다섯 가지를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왕비 살해로부터 동양평화 교란에까지 이르는 죄목들은 안중근의 신념과 거사의 당위를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었다.

"안중근의 귀에는 더 이상 주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러시아인 틈새로 이토가 보였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은 적막했다. (…) 안중근은 다시 조준했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 찰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 주변에 서 있던 일본인 세 명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몸으로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코레아 후라"

소설 「하얼빈」이 그려 낸 안중근의 거사 장면이다. 작품의 중앙에 배치됐다. 「하얼빈」은 모두 31개의 번호가 붙은 장으로 구성됐는데, 위의 거사 장면은 15장에 배치됐다. 김훈이 이 거사 장면을 하이라이트나 클라이맥스로 삼고자 했다면 아마도 작품의 후반부에 배치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작가가 은연중 거사 이후의 행적을 부각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은 거사 이후 감옥에서 6개월을 살았다. 그 6개월간 안중근의 행적이란 신문과 면회, 집필의 시간이다. 특히 자신의 전기 「안응칠 역사」와 미완의 저술이기는 하나 「동양평화론」을 우리에게 남겼다.

작가 김훈은 「하얼빈」 후기에서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고 적었다. 필자의 우거에서 가까운 남산공원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2010년 새로 건립된 기념관에 들러 청년 안중근의 삶을 되새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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