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지난 9월 1일은 음력으로 8월 첫째 정일날이라 가을 석전제례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공자 자료를 간략하게 살펴 본다.

인천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중국 산동성 곡부에서 공숙량과 안징재는 공자를 잉태한다. 공자를 태육하면서 마을에 있는 니산으로 자주 산책에 나섰다. 공자의 건강을 기원 하려는 목적이었다. 니산으로 산책하는 오르막 길에는 초목의 잎들이 위쪽으로 우러러 보고 내리막 길에서는 아래로 숙이는 모습들을 하고 있어 당시 노나라 사람들이 안 씨의 몸에는 천지의 정령이 응취돼 있다고들 했다. 공자는 서기전 550년 11월 경자날에 태어나고 서기전 477년 임술 4월 기축날에 73세로 죽었다고 했다. 다른 문헌에서는 공자 탄생일이 음력으로 8월 27일이고 기일은 2월 18일이며 70세에 죽었다고 했다. 여러 문헌마다 공자의 생년월일에 대한 의견이 다르게 전해진다.

공자의 고향이자 유교의 성지인 중국 산동성 곡부현 로창평 향추읍(궐리)마을에는 공자의 공림(묘역)·대성전이 있으며 공자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은 곳이다. 대성전은 1504년 유대 학사 이동양에 의해 완공된다. 대성전 경내에는 행단이 있다. 공자의 가르침이 있던 학당이다. 또 하나의 황람행단은 공자가 공부하던 곳으로 대성전 부근이다. 니산서원·수사서원도 공자의 학당이었다. 대성전의 필적은 나라마다 바꿔 달았다. 여원공의 필적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공림은 궐리마을에 있는 수교를 건너면 공자의 묘역에 이른다. 측백·편백·전나무의 수림으로 쌓여있는 첨원형의 묘다. 740년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받은 칭호 대성 지성 문성왕 묘라는 큰 비석이 세워졌다. 공자 부모의 사당도 니산에 자리한다. 공자는 19세에 백리와 결혼한다. 손자 자사를 보다. 공자 나이 59세였다. 공자는 15세에 공부를 시작해 세계적으로 존숭 받는 대성 지위에 오른다. 육예를 구비한 70명의 문인과 수많은 제자들이 있다. 

공자 일가 중 20세 이상의 자제들에게 처음 시작되었던 공자학 강습은 110년 전에 중국 공작학 창립회가 열린 후 세계 곳곳에 공자학당이 문을 열었다. 공자에게 배향 의식은 안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문묘에서의 석전제는 봄과 가을 음력 2월 8월의 첫째 정일날에 거행한다. 1406년 창설된 성균관 문묘에서 열리는 석전제를 사채라고도 부른다. 공자를 승봉하고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석전제가 거행 되기 하루 전부터 제례를 올리는 사람들은 성균관 제실에 머물러야 했다. 문묘에 모시는 신위는 공자를 비롯해 문인과 제자, 공자일가 67인, 중국 유현 25인, 우리 유현 신라 2인, 고려 2인, 조선14인 등 모두 112명의 신위를 모시고있다. 

석전제에서 제관은 헌작과 축문 의례를 지휘하고 집사는 제관 의례를 거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맡는 직이다. 초헌관은 왕실의 가족 또는 예조판서가 대행했다. 지역의 향교 문묘에서는 시장(부사)·군수가 초헌관이었다. 초헌관·아헌관·종헌관에 이어 동쪽 서쪽 향헌관·동쪽 서쪽 행랑채 헌관들은 성균관 사성들이 했다. 위안지락·명안지락·성안지락·서안지락·오안지락의 아악 연주와 함께 열문·소무의 무용을 하며 신위들에게 예를 표한다. 홀기를 읽으며 전폐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분헌례·음복례·첨향례·망료례를 하면서 석전제를 마친다. 

석전제는 옛 의식대로 미명 시간에 했다. 일제 때 총독부에서 성균관을 1910년 경학원으로 개칭한 후 낮에 석전제를 거행했다. 유생들의 항의와 비판이 많았다고 한다. 공자의 유교는 중국에서 거척 당하기도했다. 대성전이 파괴되고 공자초상이 철거되는 시기가 있었다. 장개석 등 중국 정치인들이 중국인들의 사상을 통일시키려는 목적으로 공자 제례를 다시 부흥시켜 놓았다. 우리나라에도 공자의 후손이 있었다. 공서린이라는 사람으로 수원 궐리사 사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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