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선 가천대 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서희선 가천대 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67세 여성 A씨는 요즘 가끔 우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딸이 모두 결혼을 하고 남편과 둘이 살면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딸을 대신해 근처에 사는 손녀를 낮 시간에 돌봐준다.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아서 주변 친구들에게 "부러울 게 없겠다"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우울감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본인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손녀를 보는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성장하는 아이를 보면 기쁠 때가 더 많다가도 불현듯 자신이 ‘새장에 갇힌 새’가 된 기분이 들어 눈물이 나기도 한다. 퇴직한 남편은 취미생활 등 온전히 본인의 시간을 갖는 데 비해 자신은 여전히 가사일에서 해방되지 못해 남편에게도 화가 늘었다.

중년 여성들이 호소하는 우울감은 생활 속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서만 기인하지 않는다. 중년 여성들의 우울감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우울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울증은 생물학적 취약성과 스트레스가 복합 작용해서 나타난다고 알려졌다.

뇌 속에는 감정과 생각, 행동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는데, 대표적인 게 세로토닌이다. 신경전달물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흐름이 원활해지지 않게 되면 맥락과 상황에 상관없이 기분, 생각, 행동이 가라앉으면서 우울증에 빠진다.

어떤 사람은 아무 스트레스가 없이 날 때부터 우울증에 취약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살면서 겪는 다양한 스트레스가 취약한 부분을 자극해서 병이 나게 된다. 

중년 여성의 우울증을 사회적으로 ‘갱년기 우울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감소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조절에 관여해 우울증에 걸리기 쉽게 만든다.

갱년기는 인체가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로, 월경이 정지되는 전후의 시기를 의미한다. 청소년기에 겪는 ‘사춘기’라는 이름처럼 ‘갱년기’라고 이름까지 붙여 준 건 이 시기에 겪는 신체적 증상들은 때로는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힘들고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호르몬은 신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체온 조절과 기억력에 관여하고 뼈의 강도 유지, 질과 방광의 점막 보호, LDL콜레스테롤의 농도를 낮추고, 복부에 지방이 쌓이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여성호르몬이 감소하면 앞서 말한 세로토닌의 감소뿐 아니라 안면홍조, 발한, 골다공증 같은 각종 신체 변화를 겪게 된다.

‘갱년기 정도 평가지수’ 항목들 가운데는 우울증의 주요 증상으로 볼 만한 항목들이 다수 포함됐다. 갑자기 두근거리고 맥박이 빨라지고 조여드는 느낌이 든다거나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수면장애, 기분이 처지고 쉽게 눈물이 나고 의욕이 없으며 감정이 수시로 변한다, 신경이 날카롭고 과민한 느낌이 든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신체 및 정신적 피로감을 느낀다 등등의 증상은 우울증 증상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중년 여성들의 우울증을 갱년기라고만 쉽게 여기고 방치해선 안 된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을 포함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약 30%가 우울감을 느끼고, 10명 중 1명은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보고가 있다.

우리나라 70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은 세계 1위 수준이다. 퇴직, 자녀들의 성장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역할 상실, 경제적 어려움 등 사회적 요인과 질병, 노화 등 신체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발현된 결과다.

또 치매 초기 증상으로 불안 등 감정의 변화, 수면 장애 등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우울감에 대해서도 본인과 가족,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년의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내가 의미 있게 여기는 활동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더 가치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선행돼야 한다.

갱년기 변화에 몸이 적응하는 과정임을 여유롭게 생각하고, 무조건 잠을 자고 쉬기보다는 운동과 규칙적 생활을 유지하며 스스로 활력을 이끌어 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자신만의 취미를 찾는 것도 좋은데, 술과 담배는 뇌를 약하게 만들며 오히려 우울증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지양해야 한다.

일상생활 중에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차를 우려 마시는 취미생활도 추천할 만하다. 카페인 함량이 높은 커피보다는 수면에 도움을 주는 차를 마시는 것이 갱년기를 원만히 지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중년 여성의 우울감이 치매 등 병적 증상이 아닌 폐경기에 겪는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라 한다 해도, 장수 시대에 노년기 삶의 질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증상에 따라 호르몬 치료를 받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폐경호르몬요법은 환자 개개인의 적응증과 치료 목표, 나이와 발생 시기 등을 고려해 시작한다.

여성호르몬 치료는 환자 의지와 가치관, 삶의 질에 대한 주관적 느낌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정답은 없으며, 개별 맞춤 치료가 필요하다. 60세 이하, 폐경 발생 10년 이내 갱년기 증상이 있는 환자에서 최대한의 효과와 안정성을 누릴 수 있다. 

<가천대 길병원 가정의학과 서희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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