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가평군 관광전문위원 경영학박사
이상용 가평군 관광전문위원 경영학박사

시대의 중심인물이나 지도층은 정세 판단과 결단력이 빨라야 한다. 사료를 보면 지도층의 결단이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나타난다. 그래서 현자들은 ‘욕지미래(慾知未來)’, ‘선찰이연(先察已然)’, ‘앞일을 알려거든 먼저 지난 일을 살펴라’라는 명구를 깊이 새기고 있는 것이다. 

1636년 12월, 청나라 군대가 강화를 지나 삼전도까지 쳐들어 왔을 때, 조선 임금은 남한산성에 피신한 채 싸울 것인가 화친할 것인가를 두고 허둥댔다. 남한산성 47일, 병력 배치를 두고 설전만 벌이는 사이 청나라 군대는 ‘홍이포’를 앞세워 공격했고, 병사들은 단숨에 전의를 잃고 말았다. 애먼 병사 대부분 동사하거나 포탄에 잃고 나서야 결국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의례)’를 하는 치욕적인 역사를 남겼다. 바로 병자호란, 남한산성 이야기다.

당시 명나라는 쇠하고, 북방의 몽골을 병합한 청나라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2대 칸 홍타이지는 1927년 명을 공격하기 전 조선을 침략한 적이 있었다. 바로 정묘호란이다. 이미 국제 정세를 판단할 경험이 축적돼 있었건만, 중립외교를 펼치지 않고 명나라에 의지한 채 고립무원의 외교를 고수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에 두 부류의 정객이 있었다. 청나라와 싸우자는 척화파 김상헌은 외교부 수장 격인 예조판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은 행안부 수장 격인 이조판서였다. 대소신료들은 대부분 척화에 동조하고 있었으며, 최명길은 홀로 화친으로서 전쟁의 참화를 막아 보려고 동분서주했다. 말로만 용감했던 척화파 세력의 득세에 못 이겨 청나라에 대항해 전투를 벌이다가 혼쭐이 난 후 인조는 신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게 나의 뜻이다. 청나라에 화친의 답서를 보내야 하는데 누가 나서겠느냐?" 

지금껏 청나라와 싸우자고 득달같이 일어서던 신료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엉거주춤 뒤로 뺐다. 그러자 이조판서인 최명길이 임금 앞으로 나섰다.

그는 31세 때 병조좌랑(정6품, 무관선발)을 하다가 명나라 사신 문제 때문에 삭탈관직을 당하고 가평군 대성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앞서 벼슬을 내려놓은 부친 최기남이 북한강가에 ‘만곡정사’라는 서원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10년 동안 역학과 성리학에 통달했고 이시백, 김육 등 문무관료들과 학문 교류를 했다.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을 바라보며 세상의 흐름을 간파했고, 정치적 감각을 익혔다. 병자호란 당시 혈혈단신 화친을 주장하던 정치감각과 내공은 10년 동안 ‘만곡정사’에서 깨달은 학문적 소산이었다.

청나라 황제에게 줄 화친문서를 준비한 최명길을 인조가 불렀다. 죽기를 각오하고 사지로 향하기 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화친을 하면 전쟁이 끝나도 모두 역적이라고 할 것이라 했다. 그는 역적이라는 모욕을 감당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궁으로 돌아가더라도 김상헌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함으로써 대척점에 있던 정적을 하나밖에 없는 충신이라고 추켜세웠다. 인조는 서글픈 목소리로 "너도 충신이다"라며 최명길을 위로했다. 그는 임금에게 "신은 만고의 역적이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단기필마로 삼전도를 향해 달렸다. 

풍전등화, 백척간두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기꺼이 ‘만고의 역적’을 자청했다. 자신의 말대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오랜 세월 역적으로 내몰렸다. 훗날 역사가들은 최명길을 나라와 임금과 백성을 구한, 하나밖에 없는 충신의 전설로 재해석하며 청과의 화친을 다자외교 정책의 모델로 삼고 있다. 

남한산성 47일, 그 역사 자료는 나라와 백성이 위험에 빠질 때 지도층의 결단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 준다. 아울러 만고의 역적을 자청하는 용기 있는 충신 한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구했는지, 남한산성이라는 무겁고 서글픈 역사문화유산이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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