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명신 한음 이덕형이 영의정 자리에 있을 때의 일이다. 마침 임진왜란이 끝난 뒤라 처리해야 할 현안들이 산더미 같았고 또 부서진 궁궐까지 보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던 한음은 소실을 대궐 가까이에서 살도록하고 시중을 들게끔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음이 몹시 덥고 목이 말라 잠시 궐 밖의 소실이 있는 집에 가서 마실 것을 찾았다. 그때 소실은 그가 올 줄을 알았다는 듯이 시원한 미숫가루를 재빠르게 대령하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한음은 얼른 마시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으니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무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은 소실은 한음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밤새도록 울었다. 이튿날 소실은 한음의 죽마고우인 백사 이항복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백사 역시 이런 한음의 뜻을 파악할 길이 없어 직접 한음을 만나 물었다. “그녀는 자네가 사랑하는 여인이 아닌가?” 그러자 한음은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세. 단지 어제의 일을 되새겨 보니 너무나도 영리하고 총명하여 나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지금 나라꼴이 어떤가? 전쟁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어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일국의 재상으로 내가 여자만을 생각하고 있으면 필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네. 그래서 처음부터 유혹의 뿌리를 끊어버리고 나라일에 전심전력하려는 나의 다짐이라네.” 세상사 분란은 모두 망상과 아집에서부터 비롯된다. 자신의 마음을 겸허하게 비우지 못하면 언젠가는 욕을 당하고 만다. 마음이 평화롭고 텅비어 있는 사람은 그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안정을 누릴 수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밷을 사람 없듯이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 비수를 겨눌 수 없다. 그에게는 빼앗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웠다'는 어휘를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영 달랐다. 민주화의 투사라 일컬었던 YS, DJ정권에서도 그랬다.
(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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