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혜숙 기사
“라디오 청취는 서민들의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대부분 라면 박스 만한 일제였는데 진공관이 발갛게 달아올라야 겨우 소리가 났다. 복혜숙, 양주동, 임택근 같은 사람들은 당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라디오 스타였다. 미 공보원(USIS)에서 배포했던….”
 인용한 글은 복혜숙(1904~1982)의 이름이 등장하는 ‘6·25 전쟁과 인천사회의 변동’이라는 『인천시사』 권5, 제1장 제2절의 일부분인데 그녀나 인천이나 서로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내용만을 전하고 있다. 그밖에 일제 때 인천 모습을 그린 전 언론인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 기록에서나 향토사가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서나 그녀의 이름이 전하는 구절을 볼 수가 없다.

 인명(人名) 사전류에도 혹 그녀가 교육을 받았던 성장지로서든 아니면 잠시 활동하던 무대로서든 그 어느 방향에서도 인천에 관련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복혜숙이 인천 출신이 아니며, 더불어 인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단정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른 여러 기록에는, 복혜숙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복혜숙은 연극과 영화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도쿄에 있는 사와모리노무용연구소로 적을 옮긴다.

 이곳에서 춤을 배웠으나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이끌려 귀국하게 되고 아버지가 강원도 김화에 세운 금성학교의 교원으로 강제 근무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가출해 그 당시 신파극을 공연하던 단성사에 들어가면서 이월화(李月華)와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연극배우로 1920년대 신파극을 공연하기 시작한다.

 1923년에는 극단 <토월회>를 결성하고, 이후 <조선극우회> <중앙무대> <배우극장> 등지에서 연기생활을 한다. 1925년에 연기 수업을 위해 현철(玄哲)이 세운 <조선배우학교>에 들어갔다가 1926년 영화계로 옮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에서도 인천의 지명은 단 한마디도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사정인데도 과거 나이 많은 인천사람들은 그녀와 인천과의 관련을 말하곤 했던 것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우선 시대 순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1930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의 기사 「風聞帖(풍문첩)」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一時(일시) 京城(경성)에서 花形女俳優(화형여배우)로 또는 人氣 妓生(인기 기생)으로 이름이 잇던 卜惠淑(복혜숙)은 一金(일금) 8백 원也(야)를 밧고 仁川(인천) 龍洞券番(용동권번)으로 花籍(화적)을 옴기엿다. 滿仁川(만인천) 浮浪遊志靑年(부랑유지청년)! 주머니 끈만 단단이 매여라.”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1931년 소설가이면서 영화인이었던 심훈(沈熏)이 잡지 『동광』에 쓴「朝鮮映畵人(조선영화인) 언파레드」라는 글에서도 나타난다.

▲ 1959년 제2회 방송문화상 수상 장면
 “卜惠淑  土月會(토월회) 俳優(배우)로 상당히 노숙한 技藝(기예)를 가지고 무대의 여왕 노릇을 하얏다. 飮酒無量(음주무량)하사대 必及亂(필급난)이요 懸河(현하)의 웅변이 여간 사내는 그의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얏다. 時不利兮(시불리혜)하야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방금 仁川서 기생 영업을 한다고. 그의 주연한 작품은「籠中鳥(용중조)」 「落花流水(낙화유수)」 「세 동무」… 等(등).”
 “그 후 그는 무엇이 동긔가 되여 몸을 휘날려 仁川 어떤 券番에 籍을 걸고 기생으로 변하고 마럿는가? 그의 『데프류-드』 백작은 누구엿스며 그의 부활제날 밤은 어느 날 밤이엿든지?”
 마지막 인용 글은 1933년 1월 발행 『삼천리』 잡지의 「우리들의 ‘카쥬사’卜惠淑孃」의 일부분이다. 이 글의 뒷부분은 불행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어둡고 우울한 복혜숙의 상황을 적고 있지만, 어쨌든 여기서도 그녀가 인천의 한 권번에 적을 두었었던 사실을 말하고는 있다.

 그리고 이 글의 말미가 “昔日(석일)에 무대 여배우로 오직 혼자인처럼 빗나던 卜孃은 지금은 仁川을 뛰여나서 大京城(대경성)의 중심 鐘路(종로)의 『바- 비-너쓰』의 紅燈靑燈(홍등청등)아래서 夜半(야반)의 취객에게 애교를 발산하면서 잇다니 때때로는 그의 붉은 입술에서는 그리운 『컬럼비아』의 『레코-드』에 맞추어 『가츄-사 내사랑』이 흘러나오지나 안는지.”로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는 다시 서울에 돌아와 <비너스>바를 경영하고 있었음을 비치고 있다.

 결국 복혜숙과 인천과의 관련이라면 그녀가 1920년대 말경 거금 8백 원을 받고 인천으로 내려와 그녀의 말대로 용동권번에 3년간 적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호구지책’을 위해 기생생활을 하던 인천에서의 3년 동안은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인천 시절에 있었던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우리들의 ‘카쥬사’卜惠淑孃」에 실려 있기는 하다.

 “사람들은 아지 못할른지도 모르지만은 卜孃은 일즉이 日本(일본)에 건너가서 某(모) 여자기예학교를 마치고 도라온 상당한 『인테리』 여성이다. 뜻이 잇서서 土月會의 무대를 밟기 시작하야서는 天分(천분)을 발휘하야 일약 『가츄-샤』 『春香(춘향)』의 大役(대역)을 마터 가지고 그 一頻一笑(일빈일소)가 능이 長安(장안)의 청춘남녀를 울리고 웃겻다.

▲ 복혜숙씨 가족사진
 土月會가 地方巡業中(지방순업중)에 곤경에 빠젓슬 적마다 卜惠淑孃은 그의 가진 바 옷, 패물은 물론이오 부득이한 때는 자긔의 몸을 인질로 잡히고까지 土月會 일행을 구해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도록 그의 일에 대한 熱(열)과 公憤心(공분심)이 컷다는 것은 아름다운 『에피쏘-드』다. <중략> 仁川에 잇슬 때 일이다. 土月會는 다시 이러낫스나 그 날의 조흔 伴侶(반려) 卜惠淑孃의 존재는 이저버렷든지 다시 부르지도 안엇다.

 그러고는 土月會는 仁川으로 진출해서 3일간 공연을 한 일이 잇스나 관객은 지극히 령성하야 아주 실패하고 도라왓다. 누가 알랴? 土月會의 무정에 분개한 卜孃이 분푸리로 관객을 모조리 매수한 때문이엿든 줄을-.”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내용을 보면 복혜숙이 배우로서 크게 명성을 얻었던 극단 <토월회>에 대해 적잖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풀이 관객 매수 운운하는 것이 풍설이라고 해도, 유명한 극단 <토월회> 공연을 관람하려는 인천 관객을 모조리 매수할 수 있는 복혜숙의 든든한 금력(金力)과 더불어 인천에서 누리던 인기가 말 그대로 대단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다음의 기록을 보면 복혜숙과 <토월회>의 관계를 더욱 용이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록은 1936년 4월 잡지 삼천리에 실린 「女高出身(여고출신)인 인테리 妓生·女優·女給(여급) 座談會(좌담회)」에 참석한 여배우 프로필 중 복혜숙에 대한 소개이다.

 “卜惠淑女史는 東京 유학시대에 朴勝喜(박승희)씨 등과 함께 土月會를 조직하여 가지고 나와서 ‘松井須磨子(송정수마자)’만치 갓쥬샤를 잘하기로 일홈을 떨첫고, 그 뒤 영화배우로 극의 주인공으로서 이 방면의 運動(운동)에 10년 보낸 이다. 그사이 上海(상해), 東京, 奉天(봉천) 등지로 巡業도 나서서 각지로 周遊(주유)하며 이 땅 향토예술 소개에 盡力(진력)하다가 지금은 서울 仁寺洞(인사동)에서 喫茶店(끽다점) 「버-너스」를 경영 중, 그동안 생활에 쪼들너 妓籍(기적)에 몸을 둔 적도 잇는 역사 만흔 女史다.”
 우리에게 알려진 복혜숙과 인천과의 관계는 이상과 같은 내용이 전부이다. 아쉽게도 우리 인천은 이처럼 그녀의 본업인 연기생활과는 관계가 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삶에 얽힌 3년의 연고가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그녀를 인천의 예술인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복혜숙의 이 같은 인천 생활 3년이 인천의 고로(古老)들의 입에서 흘러나와 인천과 그녀를 연관 짓게 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초창기 영화배우였던 복혜숙. 한국의 「카츄사」로 불리던 최초의 연극배우 복혜숙. 예명인 혜숙(惠淑)보다 본명인 마리(馬利)가 더 어울렸을 법한, 일세를 풍미했던 대 여배우 복혜숙에 대한 그 당시의 평가를 다시 읽어 본다.

 “토월회가 창립되여 가장 인긔를 끄는 상영작품은 「카쥬샤」인데, 그「카쥬샤」의 역을 복헤숙씨가 마터 하엿다. 복헤숙 양은 무엇보다도 잘 울고, 잘 웃는다. 매소부로서 감옥에 드러가 고민하든 장면 가튼 것은 복헤숙씨 아니고는 그러케 효과를 내지 못하엿슬 것이다. 마쓰이스마꼬(須磨子)가 카쥬샤의 역을 잘 하야 력사적 명녀우의 일홈을 들엇거니와, 일본에 카쥬샤를 마쓰이스마꼬라 하면, 조선의 카쥬샤는 이 복헤숙 양이 아니될가.”
 〈※인용문에 처음 나오는 한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괄호안에 한글을 병기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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