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예술과 외설의 기준을 놓고 명확한 차이의 결론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다. 지난 50년대에는 외설에 해당된다고 하던 사례들이 최근 들어서는 예술로 평가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는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해서 경찰이 단속에 나설 때도 있었으니 외설과 예술의 차이는 시대적인 상황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100년 후에는 어디까지가 외설이고 예술인지가 또 다른 의문으로 다가온다. 미국의 경우 1950년까지만 해도 학문의 중심지였던 매사추세츠주에서는 박물관의 누드 동상을 사진에 실을 수 없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성해방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플레이보이' 같은 외설잡지가 서점의 책꽂이에서 내로라하는 뉴욕타임스와 나란히 전시됐다. 미국도 이같은 외설과 예술의 차이를 놓고 혼돈을 거듭하던 중 1967년 존슨대통령 시절 외설물에 대한 위원회가 처음으로 구성됐다. 당시 3년간 무려 2천만달러 이상의 연구비를 들인 이 위원회는 아주 파격적인 결론을 내려 주목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외설물은 기본적으로 해가 없으므로 미국연방과 각 주에 있는 외설물에 대한 규제법안 114개 조항을 전부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대신 청소년에게 외설물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광범위한 성교육을 시키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당시 이 제안은 닉슨 대통령과 상원에서 거부돼 시행되지는 못했다. 미국은 그러나 1973년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 현재까지 적용해오고 있다. 이 기준에 보면 ▶보통사람이 보기에 전체적으로 외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가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가 ▶표현양식이 특히 불쾌한가 등 세가지를 그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역시도 아직까지 애매모호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외설을 `남녀간의 육욕상의 행위에 관한 추잡하고 예의 없는 일 또는 남의 색정을 도발하고 또 자기색정을 외부에 나타내려고 하는 추한 행위'라고만 적고 있다. 최근 영화나 연극 또는 대중가요 가사 등을 놓고 예술성에 대한 논란이 과열되고 있다. 게다가 단 10분만 승용차를 주차해 놔도 전라의 여성사진이 실린 전단지가 빼곡이 꽂히기 일쑤다. 하루 빨리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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