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선수들이 없어 체육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모아 선수로 뽑고, 만들고 했는데 요즘은 모든 것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선수 수급 역시 원활하게 이뤄지는 것 같다.”

“못 먹고, 배를 곪아 가면서 하던 운동이 이제는 운동으로 밥 먹고 사는 시대가 왔으니 이 얼마나 좋은 시절인가!”

인천에는 지난 1950년 전후로 운동을 시작해 잠시 6·25전쟁으로 수그러들었지만, 전쟁의 아픔을 딛고 체육을 통해 인천시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체육인들이 아직 인천체육의 산증인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비록 80세 전후로 기력은 많은 약해졌지만, 체육에 대한 열정만은 젊은이 못지않게 쟁쟁해 지금도 인천체육 곁에서 인천체육 발전을 위해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런 인천체육의 산증인이 있어 오늘날 인천체육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 인천체육의 의미

현대사에서 체육은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확립하고 억압된 민족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 왔다.

우리나라의 근대체육은 과거 일제의 수많은 탄압과 폐쇄적인 여건 속에서도 애국계몽을 위한 활동으로 꾸준히 계승돼 조국광복의 커다란 부문에 공헌했다.

   
 

어려운 과거사에서도 수많은 체육인들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고, 이에 세계 속의 스포츠강국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특히 인천은 우리의 근대체육의 최초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구한말 열강의 국가들이 군함을 타고 수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인 인천에 도착, 경인철도를 통해 여러 지역으로 생산적 활동과 선교활동들을 시작했다.

우리의 문물 또한 세계로 진출하려면 인천을 통해야 가능했다. 이렇듯 인천은 당시 수출입의 중심지였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항구도시였다.

즉, 새로운 문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인천항을 통해 전해졌으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 도시였다.

이와 같이 수용된 다양한 문화 가운데 근대스포츠도 포함돼 있었다. 도입 초기의 근대스포츠는 우리 정서와는 너무도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문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융합된 것이다.

인천에는 제물포항의 근거리에 조계지를 둬 문화 공존의 가능성을 더욱 짙게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여러 외국인들은 타 지방에 비해 활동이 매우 자연스러웠고, 낯선 문화에 대한 배척도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시의 특성을 가진 인천이 결국 신문화의 수용을 좀 더 수월하게 해 준 것이다.

신문화와 함께 수용된 근대스포츠는 인천항 등을 통해 들어온 외국 선원, 선교사, 해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또한 학교와 기독교단체, 운동회, 애국계몽단체, 청소년단체, 체육단체 등을 통해 그 중요성이 보급·계몽됐다. 이같이 근대 이후의 우리나라 체육역사의 최초 시작 지역은 바로 인천이다.

인천은 오는 2014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는 등 급성장하고 있으며, 그 역사성으로 인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 인천시체육회의 태동

   
 

인천시체육회는 1981년 전만 해도 인천이 경기도에 속해 경기도체육회와 함께 모든 체육활동과 체육행정을 펴 왔다. 당시 경기도체육회가 인천에 있을 정도로 인천체육 역시 그 규모 면에서 다른 지역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 인천이 1981년 7월 1일 경기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체육회도 경기도체육회에서 ‘인천직할시체육회’로 독립했다.

국민체육 및 지방체육 진흥으로 시민의 체력 향상과 건전하고 명랑한 기풍을 진작시키고 가맹경기단체를 통할 지도하고 우수한 경기자를 양성하는 설립 취지 아래 대한민국 체육 및 경기도 체육의 근간을 이뤘던 ‘인천체육’이 법률 제3424호 지침에 의거 ‘인천직할시체육회’로 출발한다.

그리고 그해 7월 14일 인천 초대시장인 김찬회 시장이 당연직 인천시체육회장으로 5명의 부회장, 1명의 사무국장, 20명의 이사, 2명의 감사 등으로 인천직할시체육회 초대 이사회가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인천체육의 모든 것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83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인천에서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제64회 전국체육대회’를 처음 단독으로 개최하면서 인천체육이 한 단계 올라간다.

이어 1999년 인천에서의 두 번째 전국체전인 제80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고, 2007년에는 세 번째 전국체전인 ‘제93회 전국체육대회’를 유치한다. 이 93회 전국체전은 2010년 다시 2014인천아시안게임 전초전

   
 

으로 대회를 치르기 위해 대구와 순서를 바꿔 내년 제94회 전국체육대회 개최로 최종 결정된다.

6·25전쟁으로 제1회 인도 델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1954년 제2회 마닐라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 아시안게임 최초 메달을 획득한 임배영(80)인천체육인회장은 “인천체육은 초창기 경기도체육과 함께 대한민국체육을 이끈 모태”라며 “우리 인천체육인들은 이런 자부심을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선수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 구도 인천에서 2014아시안게임까지

‘2008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의 영광을 품에 안은 야구가 국내 최초로 시작된 곳도 바로 인천이다.

1899년 일본인 후지야마가 영어야학회에 다니면서 일기에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기록을 따른다면 인천은 국내 최초 야구 시합이 열렸던 곳이 된다.

이는 한국 야구사에 1905년 미국인 선교사 길버트가 황성기독청년단 회원에게 야구를 가르쳤다는 기록보다 앞선다.

이 때문에 인천을 ‘구도(球都)’라고 부른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에 위치했던 웃터골운동장은 최초의 공설운동장이기도 하다.

1924년에는 인천 최초 야구팀인 ‘한용단’과 일본인 쌀거래소 직원들로 구성된 ‘미신팀’과의 결승 경기에서 편파 판정으로 한용단이 패하면서 관중들끼리 충돌해 2년간 인천에서 야구 금지령까지 내려지기도 했다.

인천은 야구 명문인 인천고·동산고·제물포고 등을 통해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구도의 열기를 이어받아 오는 2014년 9월 19일에는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개막된다. 1986년 서울, 2002년 부산 등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정부 차원에서 추진됐지만 자치단체가 개최하는 것은 인천이 처음이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45개국 1만3천여 명의 선수들이 36개 종목에서 기량을 겨룬다. 주경기장을 비롯해 총 8개 경기장이 신설됨으로써 인천은 스포츠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무엇보다 유치 확정 후 정부와 대립해 오던 주경기장 신설을 비롯해 경기장 건설 등의 문제가 마무리되면서 탄력이 붙을 줄 알았던 아시안게임 준비가 요즘 인천시 재정 문제로 또 한 번 정부와 신경전을 벌이면서 관계자들이 가슴을 졸이고 있다.

앞으로 2014인천아시안게임은 동북아 허브도시를 꿈꾸는 인천의 뜻을 가능하게 할 최대 스포츠 행사가 될 것이다.

임배영 회장은 “오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은 인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명예가 걸린 대회로,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며 “이런 아시안게임을 정치적인 논리로 해석하고, 인천의 실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관여해 혼란만 주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인천시체육회 2~4대 사무국장을 역임한 고철호(75)전 인천시체육회 사무국장은 “선수가 없어 메달을 따기 힘들었던 시절에서 이제는 생각만 하면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는 시대가 왔다”며 “이런 근간에는 지방체육의 힘이 매우 컸다”고 주장했다.

   
 

또 인천야구의 한 시대를 장식한 그는 “요즘은 학생 야구선수들이 쉽게 선진 야구를 접할 수 있으므로 그런 선수들에게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지도자들이 두 배로 노력해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인천야구 지도자들을 지적했다.

고 전 사무국장은 “인천은 아시안게임으로 인해 이제 다른 지역에 뒤지지 않는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며 “스포츠시설을 놓고 적자니, 흑자니 등을 가지고 말이 많은데 이는 진정한 스포츠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급속도로 변해 가는 생활환경에 미치는 생각을 못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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