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자본과 종교. 이 두 개념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이나,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는 19세기 말에 시작된 미 서부 석유재벌의 탄생과 그 자본을 필요로 하는 종교의 탐욕을 그려낸 작품이다.
한 남자가 좁은 갱도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다. 불꽃이 튀고, 먼지가 날리는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남자는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는다.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다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지만, 그 순간 새로운 금맥을 발견한 남자는 기어서 산을 내려간다. 석유시추업자로 업종을 변경한 플레인뷰는 서부지역을 돌아다니며 땅을 사들이며 석유시추 사업가로 활약한다.
리틀 보스턴에 석유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플레인뷰는 아들 H.W.와 함께 지역민의 땅을 인수해 석유를 뽑아내기 시작한다. 언제나 그의 성공 뒤엔 아들이 있었다. 플레인뷰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 아들을 적극 활용했다. 자신의 사업을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말하는 그는 모든 일의 중심엔 가족이 있다며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잡는다. 시추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 인부들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정착할 것이며,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도 뒤이어 들어오게 될 거라고 장담한다. 그는 시추 작업의 성공이 행복한 미래를 약속할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사실 H.W.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사업상 필요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고아소년일 뿐이었다.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남자. 어떤 희생도, 어떤 악조건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이 남자.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석유뿐이었다.
그러나 플레인뷰에게 ‘종교’라는 걸림돌이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 무리의 종교집단을 이끄는 목사는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목사는 플레인뷰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하지만 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새 성전을 짓기 위한 헌금이었다. 자본가 플레인뷰가 석유산업을 통해 자신의 성전을 이루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사의 목표는 이 땅에 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타락한 종교는 신념과 상관없이 자본가와 손을 잡고, 자본가는 종교와 신에 대한 경외심이 아닌 단지 부의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종교와 하나가 된다. 이 불안한 합일은 향후 전개될 거대한 파국을 예견하지 못한 채 탐욕스러운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선인과 악인이라는 일반적인 분류로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이다. 냉혹한 사업가이지만 사악한 인간은 아니다. 플레인뷰가 저지른 잘못이라면 끝이 없는 자신의 욕망을 누구보다 순수하게 쫒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욕망, 석유와 석유를 통한 부의 획득은 그의 인간성을 파괴시키고 주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어 간다. 그것이 바로 돈과 욕망의 유혹이 낳은 사악한 측면일 것이다. 아무리 합리적인 판단을 해도, 스스로 망가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봐도 탐욕의 늪에 빠져들게 되면 나약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해 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타락한 시대와 손을 잡은 종교 역시 인간을 돕기엔 역부족이다.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욕망을 종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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