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내 작품을 설명하라니까 할 말이 없어요. 나는 그냥 아무거나 막 그려요.”

지난 20일 ‘이진경 13번째 개인전-복숭아꽃’ 전시가 한창인 카페 라온. 작가의 말이 딱히 틀린 말이라고도 할 수 없건만, 속에서는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말 한마디하고 일어나서 다른 일을 하거나 기사로 포장하기 어려운 단답형 대답만 수차례. 30여 분 동안 ‘특별한 매력이 있는 인천, 그 중에서도 신포동이 좋아 자주 오간다’, ‘이번 전시로 인천에 사는 중학교 동창 한순정을 찾고 싶다’ 정도의 정보만 습득한 기자는 시쳇말로 ‘멘붕’이 오기 직전이다.

생각지도 못한 구원군, 인천 신세계갤러리 김신애 큐레이터를 현장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인터뷰 기사는 쓰지 못했으리라. 작가의 오랜 지기인 김 큐레이터는 “선생님을 소개할 때 ‘휴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 쌈지길이라는 인디문화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이야기한다”며 “하나같이 소박한 작품들이지만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명료한 설명을 들은 뒤에야 작가의 글씨 작품들이 눈에 박힌다. ‘국가는 국민이다’, ‘앞산’, ‘부지런하라’ 등 작가의 속내가 자못 궁금한 작품들은 기자도 알고 있는 ‘이진경체’로 완성됐다. 웬만한 쌈지 상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중에게 꽤나 친숙한 글씨체다.

이번 전시에 선보여지는 그림들도 글씨 작품들만큼이나 깔끔하고 직설적이다. 제기에 올라간 탐스러운 포도, 비워지거나 채워진 종지, 밥이 가득 담겨 있는 밥그릇 등등. 신기하리만치 소박한 작품들의 이면에는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의 수고가, 고향의 추억을 더듬는 작가의 애잔함이 담겨 있다.

작품에 눈을 떼지 못하는 기자에게 작가는 “양 기자처럼 사람들은 ‘어떻게 왜 이 그림을 그렸나’를 궁금해하지만 실상은 작은 해프닝이 일어나면 내 안에 있었던 것이 그냥 벌어지는 식”이라며 “물감이 깨져 아까우면 첩첩 산을 그리고, 특별히 쓸 일이 없는 분홍색 돌가루를 개어 놓고서는 ‘복숭아꽃’을 적었다”는 설명을 더했다.

질문의 반 이상은 4차원적인 대답이 돌아왔지만 ‘우리 문화’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는 다른 강한 힘이 실렸다. 그는 “문화만큼 다양한 것이 없건만 정작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서구·유럽 문화뿐”이라며 “앞으로는 강요된 예술에서 벗어난, 말을 걸 수 있는 그림들이 많아질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지난 12년간 지속해 온 쌈지길과 쌈지농부 아트디렉터 일에서 손을 놨다. 건강 악화가 원인이었지만 ‘그동안 바빠서 떠올리지 못했던 인연과 일들’로 인해 더 바빠진 그다.

당분간 개인 작품 활동에 매진할 계획이라는 작가는 이참에 미감(美感)에 관한 책도 쓰고 ‘가치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도 했다. 10여 년 전 외래어가 넘치는 서울 한복판에 한글 작품으로 충격을 더한 작가의 바지런한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이 작가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인천에서, 동시간 카페 라온과 신세계갤러리 전시를 갖게 됐다”며 “각자의 가슴에 담긴 ‘고향’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험난한 인터뷰에도 ‘헤어지기 아쉽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 이 엄청난 작가의 전시는 오는 3월 14일까지 중구청 인근의 카페 라온, 3월 17일까지 신세계갤러리 인천점에서 각각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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