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903년 4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효시라 일컫는 양무호(揚武號)가 시커먼 연기를 하늘로 내뿜으며 인천항에 들어오고 있었다. 3천400여t급 1천750마력으로 최대 속도 13.5노트를 내고 먼 바다에까지 항해할 수 있는 이 대형 선박은 전장 105m, 폭 12.5m에다 8㎝ 포 4문과 5㎝ 기관포 2문을 좌우에 각각 장착한, 그야말로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이름자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 누구도 이 군함이 단명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개항을 전후로 우리의 바닷길은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사건,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집채 만한 덩치의 화륜선, 대포까지 장착한 함선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만큼 그러한 화륜선을 보유하고 싶은 욕망도 컸다.

당시 국력은 해군력의 우열로 좌우됐고 그것이 바로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다. 고종은 개화사상에 불타오르는 젊은 승려 이동인에게 왕실의 비자금으로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라 밀명했지만 수구파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첫 시도는 좌절됐다. 일본이 용인할 리 없었음은 물론이었고 이후에도 모든 첩보망을 총동원해서 조선의 군함 구입을 원천 봉쇄했다.

고종은 군함 구입에 앞서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영국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이어 1893년 강화읍 갑곶리에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생도 50명과 수병 300여 명을 모집해 개교했는데 이것이 바로 ‘통제영학당’이다. 그러나 해군력 증강을 우려하는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 다음 해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군함을 향한 고종의 위대한 꿈은 그로부터 8년 후 양무호 구입으로 드디어 이뤄졌다.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라스(Pallas)호라는 화물상선으로 1894년 일본 미츠이물산이 25만 원에 구입해 일본-홍콩 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구입 시부터 9년이 지난 시점인 1903년 한국 정부가 이 배를 다시 넘겨받을 때 그 값만은 오히려 더 올라 개조 수리와 무기장착비 일체를 포함해 55만 원이었다.

그러나 군함 개조공사를 거쳤다고 했지만 퇴역한 일본 군함에서 떼어낸 구식 함포를 달아놓은 정도였고, 그나마 구입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4개월여 동안 인천항에 억류되는 수모를 당하다가 이해 8월 22일 시운전을 거쳐 우리 군함으로서 정식 등록했다.

더구나 이를 운용할 마땅한 인력조차 없었고, 하루 석탄 43t이라는 막대한 운항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이 배는 제대로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무단 징발됐다가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무기는 일본군이 제멋대로 떼어낸 후였다. 결국 1909년 경매를 통해 다시 일본 하라다상회에 4만2천 원에 매각됐다.

당시 양무호 구입금액은 국방예산의 30%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군함 구입 자체를 원천 봉쇄하던 일본이 자국의 운송회사를 내세워 조선에 함선을 판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만한 대목이었다.

거기에는 ‘국력 강화’라는 그럴듯한 국가적인 명분과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음모와 비리가 숨어 있었다. 처음부터 대한제국 군주의 무지와 일본의 속임수, 아첨하는 관료들이 어우러진 ‘사기’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어 양무호 문제가 비등해져 가는 가운데 또다시 일본 코베조선소에 새로운 군함 1천t급 광제호를 주문하게 되지만 군주의 맹목적 의지를 일깨워 주는 충절도 없었고 조정의 관료들은 미구에 닥쳐올 국권 상실에 대해서 그저 외면하기만 했다.

세월은 흘러갔지만 그러한 구태는 오늘에도 계속되는 듯하다. 국가라는 외형은 커지고 강력해진 것 같기는 한데, 아직도 곳곳에는 국민을 담보로 치부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마피아’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그동안 화려한 수식어와 외피만으로 우리 사회의 성장을 평가한 것은 아닌지, 진정한 선진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100년 전 역사를 통해 되새겨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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