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지난달 유행하던 최신 가요도 한 달 사이에 흘러간 곡이 돼 버린다. 어쩌면 한 달도 길다.

 인기 가수의 신곡은 발매 당일 음원차트 올킬, 방송 첫 주 1위를 차지하는 행보는 어느새 익숙한 패턴으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신곡이자 히트곡은 1~2주 정도가 흐르면 철 지난 유행가가 돼 버린다. 패션업계에서는 주일도 길다.

SPA(회전율이 빠른 패션)브랜드들은 일주일에 두 번, 그러니까 약 3일 만에 한 번씩 신상품을 업데이트한다. ‘핫 아이템’일지라도 2주를 버텨내기 어렵다.

 이렇듯 유행의 주기가 빠른 시기에 스테디셀러가 되기란 녹록지 않다. 아니, 정말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디셀러라 불리는 시대의 아이콘은 존재한다.

유행이 유행을 낳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그 자체로 한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 주자가 있다. 오늘은 9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콘, 영화 ‘중경삼림’을 소개한다.

1995년을 포함한 90년대는 세기말의 기운이 팽배했다. 그 세기말은 100년의 끝이 아닌 1천 년의 끝이었다. 1999가 2000이 되는 시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등장한 이 작품은 당시 청년세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영화의 주 무대인 홍콩이라는 공간도, 파편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영상과 흐르는 네온 불빛도,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를 몇 배로 증폭시키는 OST까지. 이 작품은 90년대 청춘의 감수성과 부유하는 세기말적 개인주의와 뒤섞여 ‘왕가위 신드롬’을 일으켰다.

작품의 서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경찰 223이 등장하는 1부와 경찰 663이 등장하는 2부. 독립된 두 에피소드는 묘하게 교차되며 하나의 시공간을 이룬다. 등장인물은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이들에게 오늘이란 잃어버린 대상을 되찾고 싶은 마음 즉, 과거의 연장선이었다. 그러나 과거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들이 깨달은 건 모든 것은 결국엔(혹은 반드시) 변한다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의 범주에는 자신도 속해 있음을 느리게 알게 된다.

당시 신드롬을 형성할 만큼 이 작품에 대한 국내 팬들의 열광은 대단했다. 이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홍콩은 세계의 어느 곳보다 세기말의 징후를 앞서 느껴야 했다. 이는 중국 반환이라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50년간 영국의 지배 하에 있던 홍콩은 1997년 7월 1일 0시를 기해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됐다. 한 세기 반을 다른 체제로 살아왔던 홍콩인에게 국적의 변화는 1천 년의 세기 변화보다 더욱 커다란 진폭으로 불확실성을 안겨 줬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알레고리로 작용하는 ‘중경삼림’은 홍콩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세기말을 살아가는 청춘들과 교감하며 큰 반향을 이끌어 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망각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행복의 조건”이라 했다. 이는 이미 지나버린 과거나 도래하지도 않은 미래에 집착하며 매달리기보다 자신의 오늘, 지금의 삶에 중심을 두라는 의미다.

분명하고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다소 애매하고 상징적인 이미지의 감각적 결합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우리가 사랑할 것은 현재와 그 지평선 위의 삶’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궁극에는 건네고 있다.

지나치게 신파적이거나 계몽적이기보다는 무심한 듯 건네는 위로의 시선은 당시를 살아가던 불안한 청춘들과 코드가 맞았다.

그런 감각적인 교감에서 얻은 작은 다독임이 위로가 됐기에 그때 우리는 그토록 열광했던 것이 아닐까! 1995년의 영화는 어느덧 추억의 나이테가 돼 지나온 삶을 반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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