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임금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이는 아마 태종과 세조 두 군주일 것이다. 역사를 보는 이에 따라 그 둘을 희대의 폭군이라고도 하고, 조선 왕업을 다진 위대한 군주라고도 한다.

태종은 임종 시 세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천하의 모든 오명(汚名)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너는 어진 임금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도록 하라.”

그의 오명은 그의 동료이자 충신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철퇴로 때려죽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선 건국 이후 강력한 왕권 통치의 신봉자였던 태종 이방원은 제1,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권파인 정도전을 비롯한 반대파를 모조리 쳐죽였다.

피비린내 나는 왕권 쟁탈전을 거쳐 권좌에 오른 태종은 이후 18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피의 숙청’을 통해 왕업의 기틀을 다졌다. 가장 먼저 그의 희생양이 된 인물은 이거이로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사병 혁파에 반대하다 제거됐다.

또한 태종은 외척에 대한 강박적 경계심으로 자신을 도왔던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을 모두 도륙했고, 이후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집안까지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이러한 피의 숙청으로 세종대의 태평성세가 열렸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선 개국’과 ‘왕권 강화’를 위해 피의 숙청을 휘두른 잔인하고 비정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왕조를 든든하게 세운 창업과 수성의 군주로 칭송받고 있기도 하다.

포악과 잔혹성에서 태종 못지않은 세조는 어떤 인물인가.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엇갈린다.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이면서도, 부왕인 세종의 위업을 계승한 치적군주의 이미지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을 철퇴로 격살한 뒤 왕위를 찬탈했다. 당시 쿠데타의 핵심 참모였던 한명회는 살생부를 작성해 입궐하는 대신들을 모조리 칼로 베어 죽였다. 재위기간 중에 일어난 사육신(死六臣) 사건과 금성대군 복위운동, 이시애 난 등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세조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을 체포해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을 가한 뒤 마지막에는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으로 마무리했다.

세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잔인한 군주였으나 14년 재위기간 업적도 많았다. 진관체제를 완성시켜 국방을 안정시키고 세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각종 과학기술 서적들을 편찬했다.

특히 「경국대전」을 편찬해 조선왕조의 기본법을 만들었고, 과전법을 직전법으로 만들어 토지제도를 안정시켰다.

대개 ‘조(祖)’의 묘호는 개국자에게 주어지는 묘호인데 그에게 ‘세조’라는 묘호가 주어졌고, 종묘에서 아무리 대수가 달라져도 결코 신주가 옮겨지지 않는 불천위(不遷位)의 지위가 주어졌다.

태종과 세조를 볼 때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떠오른다. “군주된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과거 독재자로 봤던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새롭게 평가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독재의 과도 많았지만 과연 이승만과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 7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기」를 쓴 사마천처럼 정의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이숙제는 인과 덕을 쌓고 청렴·고결하게 살았지만 굶어 죽었다.

 한편 도척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치는 등 포악·방자해 수천 사람을 죽였지만 천수를 누렸다. 그래서 나는 의심한다. 천도는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天道是耶非耶). 2천 년 전 품었던 사마천의 의문이 여전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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