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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호 경기도 기획조정실 평가기획팀장
지난 9월 서유럽 4개국을 여행하면서 화산재로 뒤덮여 사라졌던 도시 폼페이를 둘러본 시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새로운 사실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936년 전인 AD 79년 8월 24일 오후 1시 무렵부터 폼페이 인근에 있는 베수비오 산이 폭발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 도시에는 2만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화산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약한 지진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 대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베수비오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산재는 놀라운 속도로 도시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날 새벽 1시께 거대한 연쇄 폭발이 이어지면서 뜨거운 용암 덩어리가 순식간에 도시를 삼켜 버렸다.

 다소 판단이 빨랐던 사람들은 화산재를 피해 폼페이 남쪽 나폴리 만을 끼고 있는 작은 해안도시로 피난을 떠나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폼페이 주민들이 화산재를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오직 바닷가뿐이었다고 한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화려했던 도시였으나 79년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인해 엄청난 양의 화산재에 뒤덮여 잿더미 아래로 모습을 감추게 됐고, 이후 1592년 우연한 기회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건 다름 아닌 고통 속에 죽어 간 사람과 동물들의 모습이 담긴 화석이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과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 교수의 화산재 덩어리 속 빈 공간에 액체로 된 석고를 부어 만든 화석을 통해서 본 폼페이는 역사적·문화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어 보였다.

아이를 꼭 껴안은 어머니, 입을 막고 움츠린 소년, 서로의 품에서 죽어 간 연인, 연기를 피해 고개를 숙인 남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강아지 등 다양한 형태의 화석들은 표정까지도 처참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어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재앙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만 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 버린 화석들의 모습은 당시의 고통을 여실히 보여 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는 연인의 인간화석은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보여 주는 듯해 보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자극하기도 했다.

 도시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는 여관, 마구간, 병원, 공중목욕탕, 식당, 술집, 매음굴, 카페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광장과 원형경기장 그리고 극장 터가 발견됨으로써 폼페이는 원래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인기 있었던 리조트 도시였다는 사실이 수긍이 된다.

특히 원형경기장은 1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당시 폼페이의 도시 규모와 생활상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앙상하게 기둥만 남아 있는 제우스 신전 뒤로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언제 또다시 용암을 분출하고 화산재로 뒤덮을지 알 수 없기에 왠지 모르는 불안감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황금 팔찌의 집에 소장됐던 ‘정원이 그려진 벽화’는 작자 미상의 유물이라고 하는데 길이가 10m에 달하는 큰 그림으로 푸른 정원 안에는 다양한 새의 몸짓과 분수대 등 아름다운 풍광도 연출하고 있었다.

 성곽과 원형경기장, 호화스러운 저택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비밀 의식을 묘사한 벽화 등 곳곳을 둘러보면서 폼페이라는 도시! 1천5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지하에서 화려했던 명성들을 가슴에 묻은 채 숨죽이고 울분을 참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 같은 미스터리를 안고 있는 비운의 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옛 풍경과 당시 사람들의 일상, 대저택에서의 삶과 예술, 아름다움의 추구, 경제활동, 식생활, 신과 숭배의식, 의술과 장례문화, 그리고 최후의 날 등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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