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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기 칼럼니스트/작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나와 우리는 카포치 버스로 달려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향했다. 달리는 차로 쏟아 내릴 듯한 알프스 산들의 위용이 장엄하고 길가에 끊임없는 이어지는 포도밭들이 인상적이었다. 인스부르크에 도착했다. 눈 덮인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인스부르크는 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오는 풍경 같이 아름다웠다.

 두 번이나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이곳에는 겨울 청년 올림픽이 열리고 있어 거리 곳곳마다 홍보 안내부스가 차려져 있고 전 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이 스키를 멘 채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인스부르크 시가지를 도보로 한 바퀴 돌았다. 인스부르크는 유명한 보석 메이커 스와로브스키가 탄생한 본고장이기도 하다. 아내와 나는 스와로브스키 매장을 들어갔다.

 화려하게 디자인된 쥬얼리 액세서리,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크리스털 제품이 최첨단 고급 매대에 디스플레이 되어 우리의 눈길을 유혹했다. 나는 아내에게 이번에 성년이 되는 딸의 선물로 요즘 한국에서 인기 있다는 백조 목걸이를 사서 선물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여기서 봐두었다 면세점에서 사면 돼요."

 우리 부부는 아쉽게도 아이쇼핑만 하고 돌아섰다. 숙소는 20분을 산속으로 더 달려 도착한 그로넨 호텔이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라서 여행사에서 배려한 것일까? 지금까지 묵었던 호텔 중에 가장 고급스럽고 넓은 사성급 호텔이었다. 헌데 호텔 프런트직원이 우리 인솔자와 열쇠꾸러미를 놓고 고성을 지르며 언쟁을 벌였다. 프런트 직원은 쓸데없이 우리 한국인 여자 인솔자에게 화를 내고 큰소리를 질러댔다.

유럽인이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곧바로 뒤에 들어오는 백인친구들에게는 인상을 싹 바꾸어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서로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변하는 모습으로 보아 인종차별주의자 아니면 정신병자처럼 느껴졌다.

오스트리아 태생 히틀러가 태어난 곳이 이 근처 아닌가 모르겠다. 호텔의 등급은 건물과 시설이 아니라 서비스의 질로 정한다.

아무리 최신식 고급시설이라도 반달 창구에 손만 내밀어 키를 주는 곳은 모텔이다. 그로넨 호텔의 등급을 매기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상하게 한 최악의 서비스 때문에 여인숙보다 못한 마이너스 일등급이 되겠다.

 눈길을 5분쯤 걸어 레스토랑으로 가는데 가로등의 불빛을 받으며 눈이 내렸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환상적인 밤 풍경에 방금 전 상했던 마음은 어느 새 달아나버렸다.

우리는 러브스토리와 러브레터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양, 눈을 던지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 내일 새벽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출발이라 다들 일찍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모래시계의 남은 모래들이 아쉽게도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호텔방으로 돌아와 눈 내리는 알프스의 밤 풍경을 보면서 유럽을 정리해보았다. 일단 유럽의 위대한 문명이 지금까지 인류문명을 이끌고 온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지리상의 발견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영국의 산업혁명은 유럽의 르네상스를 바탕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결과 유럽의 문화와 문명은 추측과 기대 이상으로 위대하고 거대했다.

파리, 인터라켄, 밀라노, 피사, 로마, 폼페이, 피렌체, 베네치아, 인스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등 모든 도시들에 집적된 문화와 문명의 양과 질은 인류 최고의 것이다. 성 베드로 성당의 대리석 기둥 하나를 깎는 데만 80년이 걸렸다.

그런 기둥들이 수백 개씩 열주를 이루어 한 도시와 전체와 같은 거대한 베드로 성당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것을 깎고 세우고 짜 맞출 때의 건축기술과 공법을 생각해보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유럽은 뭔가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느꼈다.

휘청거리는 이탈리아 경제와 오스트리아 직원의 불같은 서비스, 우리의 이탈리아 투어가 끝난 바로 그 시점에 일어난 이탈리아 유람선의 좌초, 배와 승객 300여 명을 버려두고 제 혼자 살자고 도망친 이기적이고 비겁한 선장의 행태는 내가 본 유럽의 위대함과는 거리가 먼 초라함이었다(이런 일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날 줄이야!).

유럽의 어원은 페니키아어 ‘ereb’으로 ‘해가 지는 땅’이라는 곳이다. 그들의 영광은 피사의 사탑에서 지는 해처럼 서서히 기울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창밖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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