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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밭 따라온 지명… 이젠 흔적 없이 이름만 남았구나

<28> 주안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제17면

인천 사람들에게 있어 ‘주안’은 주안역을 기준으로 그 주변 일대를 가리킨다.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남구에 속하며, 주안1동에서 8동까지 8개의 행정동에서 ‘주안’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주안동의 전체 면적은 6.18㎢로 동구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15만6천233명으로 강화군, 옹진군, 중구, 동구보다 많다.

 대부분의 지명은 그 공간에 살고 있거나 지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또 사용되고 있다. ‘주안’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여서 인천 사람들은 이곳이 애초부터 주안이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원래의 주안은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과 남동구 간석동 일대를 말한다. 이곳에 있던 주안이라는 이름이 왜 서쪽으로 옮겨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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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월산에서 바라본 주안 일대.
 

# 붉은 돌산, 주안산(朱岸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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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주안염전
 남동구 간석3동과 부평구 부평2동의 경계에 해발 187.1m의 만월산(滿月山)이 있다. 만월산이라는 이름은 1934년 약사사를 창건한 보월스님이 정상에 올라 ‘산이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한눈에 다 보이고, 산세가 팔을 벌려 바다를 감싸고 있는 것이 동방만월세계약사유리광불(東方滿月世界藥師琉璃光佛)이 있는 것 같다’고 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제작된 지도나 지리지에는 이 산이 주안산으로 표기돼 있다. 주안(朱岸)이라는 한자는 붉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지금처럼 수풀이 많지 않던 민둥산 시절, 유독 붉은 빛을 띠었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그 일대의 토질이 구리 성분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주변으로 주원(朱元)고개, 붉은 마을 등 ‘붉다’라는 의미를 갖는 지명이 유독 많다.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만월산 동쪽 골짜기로 구리광산이 있었다고 하며, 1974년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면서 산 아래의 전철역에 ‘동암(銅岩)’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실제로 만월산의 정상부는 온통 붉은 빛을 띠는 바위로 이뤄져 있다.

 산에서 유래한 주안이라는 이름은 산 아래의 지명으로 사용돼 주안면은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소속 10개 면 중 하나였으며 십정동과 간석동, 구월동, 석바위 일대가 속해 있었다.

 # 주안염전시험소

 간석오거리 일대, 즉 원래의 주안이라 불리던 곳은 인천에서 가장 큰 갯골인 이른바 주안갯골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천일염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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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 천일제염시험장이 있던 자리에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남아있다.
1907년 조선통감부는 조선 땅에서 염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대장성의 기사 오쿠겐조(奧建藏)를 초청해 천일제염을 시험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게 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통감부는 대한제국 정부에 염업시험장 설치를 건의했고, 이듬해 대한제국에서는 인천부 주안면 십정리에 1정보(약 9천900㎡)의 천일제염 시험장을 설치했다. 약 1년간의 시험생산에서 성공을 거두자 염전의 이름을 주안염전으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천일제염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곳에는 조선총독부 전매국 주안출장소가 설치됐고, 여기서 시작된 주안염전은 1918년까지 모두 8개 지구 212정보로 확장됐으며 연간 생산량도 2만t을 상회했다. 조선시대 주안산 아래 동네를 부르던 주안이라는 이름이 이제 염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천일제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금밭을 만들 수 있는 완만하고 너른 갯벌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동해안이나 일본에서의 천일제염이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조수의 차가 가장 큰 지역이며, 또 넓은 갯벌을 보유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주안의 경우 갯골을 따라 염수의 공급이 가능하고, 갯벌에는 염전을 조성할 수 있었기에 천일제염을 위한 최적의 지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천일제염은 자연환경도 중요해서 우선 바닷물이 적정한 염분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고, 수분을 증발시키기 위한 충분한 일조량이 뒷받침돼야 하며, 일정한 풍량의 바람도 필요하다.

인천의 자연환경은 이러한 조건에도 부합돼 주안염전뿐 아니라 남동염전, 소래염전, 군자염전 등이 추가로 들어서게 됐고, 그 결과 1950년대 이르면 인천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우리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60%에 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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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주안공단 조성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주안역, 소금열차를 위한 역

 주안이 천일염전으로 선정됐던 또 다른 이유는 염전 주변으로 지나는 경인철도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규모로 건설된 염전이라 해도 생산되는 소금을 운송하는 데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면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안염전의 경우 염전을 따라 경인철도가 이어지고 있어 이를 이용한다면 서울을 거쳐 전국 각지로 운송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인천항을 통해 일본 본토로의 수출도 용이했던 것이다.

 처음 주안에 천일제염 시험장이 설치됐을 때 염전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은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과 부평역이었다.

 1909년 주안염전의 확장을 계획하면서 여기서 생산되는 소금의 운송을 위한 기차역의 건설도 함께 결정됐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10월 5일 조선총독부는 고시 제15호를 통해 경인철도 부평역과 축현역 사이에 주안역을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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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역 영업개시를 알리는 조선총독부 관보.
주안역이 들어선 곳은 원래의 주안, 즉 천일염전 시험장이 설치됐던 십정리에서 서쪽으로 약 1㎞ 떨어진 충훈부리(忠勳府里)였다. 앞으로 건설될 전체적인 주안염전의 위치로 보아 십정리는 동쪽에 치우쳐 있었던 반면, 충훈부리는 그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역을 뒀던 것이다. 그리고 주안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운송을 위해 만들어진 역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주안역이라 붙였다. 결국 주안이라는 이름은 기차역을 따라 서쪽으로 옮겨 가게 된 것이다.

 # 소금밭은 공단으로 변하고…

 해방 이후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평안도 지역의 대규모 염전들이 북한에 귀속됐다. 인천의 염전들은 남한 유일의 염전이었고, 여기서 생산되는 소금만으로 전국의 수요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51년 정부는 ‘소금증산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민영염전의 건설을 독려했고, 그 결과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지역에 민간에서 운영하는 대규모 천일염전이 속속 들어서게 됐다.

정부의 소금증산 5개년 계획이 성공을 거두면서 도리어 소금의 공급과잉 현상이 발생했고, 주안염전은 새롭게 건설되는 대형 염전들에 밀려 폐염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한편 정부는 국영염전을 민영화하기로 결정하고, 1963년 국영염전 관리를 전담할 공기업으로 대한염업주식회사를 발족시킴으로써 그동안 전매청에서 맡아 왔던 주안염전의 관리가 대한염업으로 이관됐다.

 수도권에서 가깝고, 철도와 항만을 배후에 둔 주안염전을 국가는 더 이상 염전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수출 위주의 산업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대규모 수출산업단지의 대상지로 주안염전을 염두에 뒀던 것이다.

 1966년 주안염전이 폐염되면서 132만2천여㎡에 달하는 염전부지를 매립해 산업용지로 전환시키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지에 공장들이 속속 들어섰고, 공장의 근로자들은 주안역 일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60년 9천 명에 불과했던 주안동의 인구는 1970년 3만2천 명, 1980년에는 12만7천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했고 1960년 1개뿐이던 행정동이 1985년에는 8개로 늘어나는 등 주안공단은 주안이라는 공간을 크게 변화시켰다.

 붉은 언덕이라는 의미의 주안산에서 비롯된 주안이라는 이름이 그곳에 들어선 염전에 붙여지고, 또 그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차역의 이름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염전의 소금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을 무렵 소금창고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공장들이 들어섰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주안이 채워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일대를 주안이라 부르고 있다. 주안이 서쪽으로 옮겨 간 까닭이다.

<글=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주안염전 약도(朱安鹽田 略圖)

 1919년 3월 21일 조선총독부 농상무성(農商務省) 수산강습소(水産講習所)에서 발행한 「조선천일제염조사보고서」의 부록으로 수록된 주안염전의 현황을 나타낸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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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조선총독부 전매국에서 관리하던 국영염전은 인천의 주안염전과 평안도의 광양만염전이었다. 이 보고서를 간행한 농상무성 수산강습소의 조교였던 노모토 슌이치(野元俊一)가 두 군데의 염전을 직접 답사한 뒤 그 현황과 관련 내용을 기록한 자료로, 초창기 주안염전의 현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

 주안염전 약도에 제5구의 염전까지만 표시되고 1919년 건설된 6~8구 염전이 누락돼 있어 1918년 상황을 그린 지도인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염업시험장이 처음 들어선 십정동의 제1구 염전부터 가좌동 일대의 제5구 염전까지 염전의 저수지와 결정지, 창고 등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으며, 제4구 염전 아래 철도변에 설치된 조선총독부 전매과의 출장소 건물도 표시돼 있다.

 남아 있는 주안염전 지도의 대부분이 1919년 이후의 것이라는 점에서 초창기 주안염전의 모습을 상세히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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