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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 경서동 음나무.
인천시 서구 경서동 506-2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야트막한 둔덕 끄트머리. 아파트를 배경으로 300살 연세(?)로 기우뚱 서 있는 음나무(키 23m·둘레 6.5m)가 아슬아슬하다.

언덕배기엔 흰 꽃을 피운 망초를 비롯한 잡풀이 지천이다. 황량한 들판에는 인적(人跡) 대신 잠자리와 나비의 나풀거림이 한가롭다. 지척에는 과거 바닷가였다는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듯 칠면초로 붉게 물든 맨땅이 푹 꺼져 있다. 누가 매립지 아니라고 할까 봐 갈대 무성한 늪이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청미래덩굴 대신 흔하디 흔한 환삼덩굴이 얼기설기한 그 땅의 참 이름조차 희미하다. ‘청라’. 같은 소리에 속뜻이 아스라하다. 이 땅은 푸른 넝쿨의 관목들이 많아 푸른 섬, ‘파렴’이라 안 불렀던가? ‘菁蘿(청라)’나 ‘靑蘿(청라)’가 더 어울릴 법한데 본디 모를 푸른 비단, ‘靑羅(청라)’다.

돌고 도는 것이 역사라 했던가? 변하지 않는 땅의 속성과 만나 청라는 묵은 새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청라도는 매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땅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청라국제도시가 자리잡은 동아건설의 김포 매립사업이 있기 훨씬 전부터 간척사업이 벌어진 곳이다. 청라도 간척사업은 황해도에서 월남한 난민들의 주도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간척사업은 구호 쌀이 지원되는 난민정착사업의 하나였다.

청라도에 정착한 황해도 출신 난민들은 1964년 9월 농지로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얻어 1970년까지 7개 섬을 잇는 길이 7천800m의 방조제를 쌓았다. 하지만 갯골로 큰물이 들락거리는 장도~일도, 청라도~문점도, 문점도~장금도 사이의 둑은 밀·썰물에 치여 무너지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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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동 음나무(왼쪽)와 용의 머리.
1970년 12월, 준공을 2개월 앞둔 청라도 간척지가 느닷없이 공업지구로 변경됐다. 건설부는 ‘1년 안에 도로 배수시설과 해발 10m 높이로 추가 매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건설부는 1971년 4월 청라도 주민들에게 ‘준공일 연장은 불가하다’며 ‘대한준설공사와 함께 합작하라’고 통보했다.

청라 주민들은 정부 지시에 따라 대한준설공사와 약정서를 맺었다. 하지만 대한준설공사는 예산과 장비 문제 등의 이유로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1972년 10월 매립면허마저 취소됐고, 그 소유권은 대기업인 동아건설로 넘어가고 말았다.

간척사업 초기 공사에 참여한 청라도와 경서동 주민들은 간척지를 1정보(9천900㎡)씩 나눠 갖기로 했다. 하지만 소유권이 동아건설로 넘어가면서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주민들은 농사 지을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 청라국제도시 개발이 이뤄지기 전 주민들이 청라매립지에서 대규모로 논농사를 지었던 연유다.

1980년 1월 정부는 ‘쌀 자립화’ 정책을 내놓았다. 농림부는 이미 고시 제3041호로 ‘대규모 간척농지 개발사업 시행규칙’ 등 후속 조치를 마련한 상태였다. 이 시책에는 ‘중동에서 놀리는 건설장비 활용’이라는 꿍꿍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중동 건설경기 침체로 동아건설과 현대건설 등 대형 건설사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국내 경제사정도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휘청거렸다. 정부는 "나라 밖에서 놀리는 중장비를 간척 등 매립사업 목적으로 국내로 들여올 때 관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특별대책을 내놓았다. 명분은 실업자 구제와 경기 회복이었다.

정부가 쌀 자립화 대책을 내놓기 무섭게 매립허가를 얻은 동아건설은 율도~청라도~일도~장도~거첨도~안암도~가서도 등 7개 섬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제방을 쌓았다. 동아건설은 11년간에 걸친 매립사업에 사업비 829억 원을 투입했다. 이렇게 얻은 땅이 청라국제도시를 포함해 36.37㎢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이도·문점도·소문점도·장금도·소도·사도·자치도 등 8개 섬이 사라졌다.

없어진 것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인천제철 앞에서 청라국제도시를 거쳐 북인천나들목으로 빠지는 중봉대로 끝자락 인천서부산업단지 맞은편에 ‘용의 머리’라는 야산이 있다. 40여 년 전 이곳은 바닷물이 닿는 ‘용두산’이라는 해변이었다. 인천시는 1970년 이곳에 분뇨처리장을 만들었다.

폐기물 처리규정이 없던 시절, 용의 머리 일대 해안은 군인들에 의해 통제를 받아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만큼 민원도 없고, 보는 눈도 없었다. 경인고속도로와도 얼마 안 떨어져 있고 외진 곳이어서 교통 체증 없이 폐기물을 운반하기가 수월했다.

이곳 분뇨처리장은 1982년까지 인천과 서울지역에서 나온 인분(人糞)을 처리했다. 말이 처리지 해변에 분뇨를 그대로 버리는 수준이었다. 바닷가 쪽으로 쭉 뻗어나간 곶, 큰 수위차를 보이는 바닷물이 밀고 썰면서 분뇨를 옅은 농도로 빠르게 퍼뜨렸다.

용의 머리를 중심으로 한 경서·연희동 일대 해안 3.1㎢는 1977년 11월 천연기념물 257호로 지정됐다. 두루미가 매년 찾는 도래지였다. 갯벌에는 분뇨 등 유기물을 먹고 자란 작은 게와 갯지렁이, 조개 등 두루미의 먹잇감이 풍부한데다가 갯고랑이 잘 형성됐었다. 먹이 사냥을 할 때 사람들의 눈에 좀처럼 띄지 않아 두루미가 경계심을 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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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나무
러시아 ‘아무르’강 중류와 시베리아 ‘칸카’호수로 되돌아가야 할 두루미들이 장기간의 비행을 앞두고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머물렀다. 기름진 먹잇감으로 살을 찌우고 힘을 기르면서 겨울나기하기에 용의 머리 해변은 더할 나위 없었다.

1984년 1월 두루미 한 마리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 뒤로는 두루미가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1988년 5월 22일 천연기념물 제257호는 지정이 해제되고 말았다. 1980년부터 시작한 동아건설의 김포매립지 간척사업 탓이었다.

음나무가 서 있는 곳은 옛 마을 초입인 ‘배뿌리곶’이다. 청라도는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을 한양으로 실어 날랐던 제법 큰 규모의 포구였다. 그 이후에는 백석동(인포·백석염전)과 검암동(서곶염전), 경서동(서구염전), 연희동(상애염전), 가정동(가정염전) 등지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서울로 운반했다.

지금 뭍으로 변한 청라도 물류 기능을 그 옆 경인아라뱃길이 대신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내륙수로인 경인아라뱃길은 2012년 5월 25일 개통됐다. 1992년 인천 굴포천 방수로 사업이 시작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건설 과정에서 환경 훼손과 경제성 논란에 휩싸이면서 운하 건설공사는 멈춤과 재개를 반복했다.

경인아라뱃길의 단초는 ‘굴포천 유역 대홍수’이었다. 1987년 16명의 사망자와 5천4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정부는 굴포천의 홍수량을 서해로 배수하는 방수로 사업을 다시 구상했다. 방수로에다 물류 기능을 더한 운하사업이 1991년부터 추진됐다. 수자원공사(K-water)가 발주한 경인아라뱃길(아라천)이었다.

수자원공사는 사업비 2조2천458억 원을 투입해 착공 2년 만에 경인아라뱃길을 완공했다. 아라빛섬, 인공폭포 등 수향8경이 조성됐다. 자전거길과 경관도로 등 파크웨이, 마리나, 전망대 등 친수공간이 꾸며졌다. 길이 18㎞, 폭 80m의 물길은 유람선이 떠다니는 새로운 관광·레저의 명소로 탄생됐다.

경인아라뱃길의 물류 기능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개통 초기 1년간 경인항과 김포터미널을 통해 처리한 컨테이너 물동량은 2만6천300TEU에 그쳤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당초 예측한 29만4천TEU의 8.9%에 불과한 수치였다. 컨테이너를 뺀 일반 화물 처리실적은 11만9천300t이었다. KDI가 당초 예상한 716만200t의 1.6%에 불과했다.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경인아라뱃길의 두 얼굴이었다. 본래 농지로 매립된 청라도가 인천 첨단산업단지로 변한 것처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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