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키드’라 불리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은행나무에 얽힌 한두 가지 추억은 있다. 어릴 적 우리네 어머니는 기침이 잦고 목이 자주 아픈 자식을 위해 은행나무 열매를 볶아 주시곤 했다. 그런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은행잎이 노랗게 익어 가는 가을이면 축구공이나 장대로 은행을 따서 부엌에 계신 어머니께 달려갔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 뿐인가, 곱게 물든 은행잎을 아끼던 시집이나 소설책 사이에 끼워 책갈피를 만들던 사춘기 소년·소녀의 순수했던 마음을 ‘60·70세대’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은행나무는 고약한 은행 열매 냄새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출퇴근 직장인과 등·하굣길 학생들도 은행 열매를 밟지 않으려 걸음을 재촉하지 못한다.

 하지만 은행나무는 3억5천만 년 전 고생대 석탄기에 출현해 영고성쇠한 인류의 삶과 고락을 함께해 온 살아있는 화석이다. 생명의 강인함에서 나오는 경외감과 모질고 풍파진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큰 스승이기도 하다. 600년 넘게 살고도 아직도 풍성하게 열매 맺는 인천 남촌동 은행나무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 남촌동 은행나무는 강인하고 웅장한 마을의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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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촌동 은행나무가 600년 수령에도 불구하고 31m가 넘는 키에 7m 줄기둘레 등 건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천시 남동구 남촌동 558번지에 소재한 천주교 인천교구 남촌동 성당에는 오랜 세월 부락의 보살핌을 받으며 변치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고령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까이서 바라본 은행나무는 마을의 수호신답게 하늘 높이 뻗은 줄기와 곧게 자란 가지, 무성한 잎에서 뿜어져 나오는 웅장함과 풍성함이 돋보였다.

신령이 깃들었다고 해 예로부터 ‘영목’으로 불리는 남촌동 은행나무는 31m의 키에 성인 6명이 둘러서도 모자란 둘레 7m의 거목이다. 오래된 나이만큼이나 상처도 깊어 생육 보존을 위해 현재 줄기의 많은 부분은 보형재로 채워져 있다. 아직도 상처난 가지 곳곳에는 치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1982년 9월 남촌동 은행나무의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해 국가보호수로 지정했고, 천혜 자원의 보호를 위해 남동구가 현재 관리하고 있다.

1945년 광복절 당시 큰 화재를 겪기도 했고 큰 가지들이 잘려 나가기도 했지만 남촌동 은행나무는 지금도 꿋꿋하게 성장하며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다. 하지만 길조와 풍년, 다산을 상징하는 남촌동 은행나무에는 사실 애달픈 전설이 얽혀 있다. 이야기는 남촌동 어느 부잣집의 시집 못 간 못생긴 셋째 딸과 홀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의 불우한 결혼생활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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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남동구 남촌동 558번지에 소재한 남촌동 성당 안에 있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성품이 좋은 가난한 집 외아들은 부잣집 셋째 딸과 어쩔 수 없이 혼인식을 치렀지만 슬하에 자식이 생기지 않자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려야 했다.

매일 밤 구슬피 울던 며느리는 지나가던 스님의 말을 듣고 300일 동안 이 은행나무에 치성을 드린 결과 자식을 잉태했지만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남촌동에 큰 흉년이 들었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자식도 가지가 부러지면서 낙상사를 당했다는 설화다. 이후 남촌동 은행나무에는 자식을 낳지 못해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매년 음력 7월에는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액운을 쫓고 마을의 풍년과 번영을 기리는 은행나무 당제를 지내고 있다.

한봉순(67)할머니는 "음력 7월 초가 되면 어김없이 구청장과 원주민들이 참석해 주민 화합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은행나무 앞에서 지낸다"며 "당제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마을 주민을 하나로 모아 주는 상징적인 행사라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은행나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남촌동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대개 우리가 만나는 은행나무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서식한다. 고령의 은행나무를 깊은 산속에서는 만났다는 이야기는 듣기가 쉽지 않다.

주로 가로수나 조경수로 인위적으로 식재된 은행나무가 절대다수인데, 그 원인은 종자를 덮고 있는 과육질의 고약한 냄새로 인해 사람 외에 은행나무 열매를 섭취하거나 배설을 통해 옮겨 심어 주는 동물이나 곤충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행나무가 기후변화와 매개 동물의 멸종으로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종에 놓인 까닭이다.

도심 속 가로수로 늘 만나는 은행나무가 멸종위기종이라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은행나무는 인간의 도움 없이는 번식하고 자생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오로지 인간만이 은행 열매를 먹으며 다른 곳에 종자를 퍼트려 준 연유로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사람이 사는 군락에서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것이다.

게다가 황금 나무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죽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참으로 경이로운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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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는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82년 국가 보호수로 지정됐다.
남촌동 은행나무도 언젠가 수명을 다하게 되면 고운 나뭇결과 수려한 줄기는 고급 가구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고, 잎은 혈액 순환 개선제로, 열매는 천식 환자나 폐결핵 환자가 먹으면 기침이 잦아지고 가래가 적게 나오는 약용으로 쓰일 게다. 또한 은행잎에는 살균 및 방부 성분이 있어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해충제로 사용되거나 책의 좀을 방지하기 위한 책갈피로도 애용돼 왔다.

특히 다른 나무들에 비해 공해에 강하고 탄소흡수율은 높아 병충해 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가로수로 많이 쓰였다. 이처럼 대기오염을 줄여 주고,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까지 선사하는 은행나무가 하루빨리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해 도심 속 보물, 모두의 추억 나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세심한 관리와 관심이 필요한 때다.

김종국 기자 kjk@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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