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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남현 인천시 계양공원사업소 공원관리팀장
공원(Park)의 개념은 르네상스 이후 봉건 영주와 귀족들의 사냥터·숲·동물방목지가 위치한 지역을 지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국왕과 귀족들이 소유하던 숲과 목장을 일반 시민에게 기부하는 의미로 개방하면서 도시공원(Public park)의 개념이 정립됐다. 1858년 뉴욕 공원경관설계 현상공모에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의 Greensward Plan이 당선돼 1876년까지 센트럴 파크(Central park)가 조성됨으로써 도시공원의 개념이 완성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공원은 영국 총영사였던 윌리엄 아스톤(W. G. Aston)이 각국조계지에 공원 조성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1884년 「대조선 인천제물포 각국 조계지도」에 Public garden(공공정원)이 표기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공원이다. 인천의 각국공원(자유공원)은 서울의 파고다공원(1897, 영국인 Brown 설계)보다 9년 앞선 1888년에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fanasjin Ivanovich Seredin Sabatin)의 설계로 조성됐다. 각국공원은 뉴욕 센트럴파크 계획안이 수립된 지 26년 후에 계획됐고, 센트럴파크의 형태가 갖춰진 1876년보다 불과 12년 후에 조성된, 당시로서는 대중들에게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화 충격을 안겨준 신문물이었다. 당시의 각종 기록에서 각국공원이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끼친 영향은 매우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주로 산책과 운동, 남녀의 데이트 장소 등으로 이용돼 현재의 공원 이용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각국공원은 제물포 개항과 함께 서구식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근대산업도시의 문명시설이었다. 도시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공익시설로 인식됐고, 상류 지식층에서 뜻을 모아 만들어 시민에게 지식과 견문을 제공해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교화시설이었다. 그에 비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던 일본공원(동공원)은 당시 제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추진했는데 신궁을 먼저 건립(1890)한 후, 1906년 일본공원으로 지정했다. 일본인들은 목적을 달성한 후에 한일합방(1910)이 되자 신사 경내에 공원 장식 시설 설치 불가, 상록수로의 수종갱신 등 사사화(社寺化)하여 신사 경내를 공원으로 혼동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후 신궁의 규모를 확대해 신사참배 목적의 일본인 외의 일반 시민은 현실적으로 출입하지 않게 돼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일본공원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민중의 손에 의해서 파괴됐고, 현재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천에 우리나라 도시공원의 문명이 꽃 피우기 시작한 지 121년(2009) 만에 또다시 서구식 현대 도시공원이 탄생됐다. 그것이 바로 송도센트럴파크다. 송도센트럴파크는 각국공원처럼 외국 전문용역사인 미국의 KPF/OveArup 등 3개 사의 분야별 전문가가 참여해 설계한 것이다. 각국공원(자유공원)이 외국인의 손과 외국자본으로 만들어졌듯이 송도센트럴파크 또한 외국인 설계가의 참여와 외국자본에 의해서 조성된 것이다. 한반도의 동고서저 지형, 우리나라의 산과 강의 흐름을 디자인 콘셉트로 담아 바닷물을 끌어 들여 조성한 송도센트럴파크는 얼마나 멋진 공원인가? 또한, 그런 멋진 공원을 일상생활에서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인천 시민은 얼마나 멋진 시민인가, 바로 인천의 ‘행복한 일등 시민’이다. 인천은 항만의 지리적 여건에 따라 예로부터 현대까지 선진 서구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잠재된 역동적인 도시이다. 뉴욕 센트럴파크가 조성된 지 12년 후에 서구식 공원인 각국공원이 인천에 조성됐고, 각국공원이 완성된 지 121년 만에 또다시 외국 자본과 외국인 설계가에 의해 현대식 도시 문물인 송도센트럴파크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인천은 ‘우리나라 도시공원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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