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기’ 진흥왕, 찬란한 청년 '정복왕' 일대기 재조명... 종영한 ‘화랑’과 대비 관심

26일 밤 9시 40분에 KBS1 다큐멘터리 ‘한국사기’가 여덟 번째 순서 ‘주변에서 중심으로, 신라’(연출 배민수)를 방영하면서 진흥왕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진흥왕 가계도를 집중 조명하면서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역사적 왕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뒤돌아보고 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KBS2 미니시리즈 ‘화랑’에서도 진흥왕이 등장한다. 삼맥종(진흥왕의 아명)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에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인물이었다면 역사 속의 진흥왕은 훨씬 더 뛰어난 카리스마를 소유하고 전쟁의 전략을 잘 짜는 지략가로 알려졌다. 일부 네티즌은 드라마 화랑이 진흥왕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제멋대로의 캐릭터 설정이라며 호된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로 알려졌다. 가계도는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며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 입종(立宗)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只召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내는 사도부인(思道)이다. 자녀는 김동륜(진평왕의 부친)과 진지왕(김사륜), 김구륜 등 3남을 두고 있다. 남동생은 숙흘종, 여동생 만호부인 등이 있다.

진흥왕은 지금의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 동부 지역, 충청북도 동부 지역, 그리고 강원도 남부지역을 지배하던 신라를 물려받았다. 이후 북쪽으로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과 영흥만으로, 서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황해 연안까지, 남동쪽으로는 가야를 완전 정복해 영토를 즉위 시점의 3배로 늘렸다. 진흥왕대에 점령한 영토는 춥고 생산력이 낮은 쓸모없는 땅이 아닌 한반도의 핵심 지역들이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시점부터 삼국시대의 주도권은 신라에게 넘어오는 신라의 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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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2에서 방송된 '화랑'은 진흥왕을 다루고 있다. 사진=KBS2 '화랑' 방송화면 캡처

공교롭게도 자신의 이름 그대로 정복군주이자 신라를 진흥시킨 왕이다. 법흥왕과 더불어 불교식으로 시호를 올린 예로 손꼽힌다. 가계도의 위쪽을 보면 선대 지증왕, 법흥왕이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를 토대로 대대적인 정복전쟁정책을 펼쳤나갔다.

진흥왕의 영토 정복의 대부분은 10대 후반과 20대에 이뤄졌다.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드로스처럼 역사의 대표적인 청년 정복군주다. 사실 진흥왕의 동시대 라이벌처럼 여겨지는 백제 성왕은 진흥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보다도 진흥왕이 열 살이나 어렸다. 젊을 때 엄청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개토대왕과 알렉산드로스와 비슷하게 43세의 젊은 나이에 명을 다하고 말았다. 초기의 연호는 개국(開國), 이후에 태창(太昌), 홍제(鴻濟) 순으로 바뀌었다.

진흥왕이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한반도의 패권 싸움을 백제 대 고구려의 싸움에서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지증왕과 법흥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겨우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와 충청북도의 일부지역의 패권국가에 불과했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전체의 최강을 다투는 경쟁에서는 사실상 밀려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진흥왕이 등장하면서 백제는 해상을 제외하고 사실상 고립돼 버렸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을 상실해 언제든지 국경을 위협당할 수 있는 처지로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이전까진 존재감이 별로 없던 진흥왕의 신라에 맞서기 위해 서로 합심해서 신라를 맞서야 했다.

특히 백제는 예전 정세로 바꾸기 위해 맹공을 가했지만 도리어 성왕이 전사하는 위기까지 겪었다. 온달 전설로 대표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줄곧 신라가 우위를 선점했고 이는 결국 진흥왕의 영토확장 시발점이 됐다.

지증왕 이전의 신라는 가야와 같은 연맹왕국 단계였으나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대를 거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확실히 변모했다. 또한 고구려, 백제와 대등하거나 더 나아가 이 두 국가를 흡수통일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갖춰 나가는 강력한 정복국가가 됐다.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고구려와 백제는 이에 맞서 신라를 맹공하나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후 황해로 통하는 통로를 열게 되면서 이때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게 됐다. 중국과의 교류로 결국 삼국통일전쟁은 중국, 신라 연합 대 고구려, 백제, 왜국 연합 구도로 점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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